연극 '신파의 세기' 극본을 쓰고 연출한 정진새와 배우 베튤. 서울문화재단 제공 "이번 연극을 만들면서 신파를 인정하게 됐지만 여전히 '국뽕 신파'는 용납이 안 됩니다."(정진새 작·연출)
오는 28일 개막하는 연극 '신파의 세기'(서울 대학로극장 쿼드)는 신파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극중 가상의 중앙아시아 신생 자립국 치르치르스탄은 국민문화진흥사업을 통해 해외의 우수한 대중문화 도입을 추진한다. 프로젝트 입찰 경쟁(총 사업비 30억 달러)이 시작된 가운데 K신파는 브라질의 삼바, K팝과 함께 최종 라운드에서 경합한다.
정진새 연출은 지난 23일 대학로극장 쿼드 '신파의 세기' 연습실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2년여 전 작품 제안을 받고 신파를 화두로 잡았다. 이후 리서치 과정에서 신파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신파를 수출한다는 설정에 대해서는 "제가 연극 종사자이다 보니 연극 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잘하는 신파를 떠올렸다"며 "신파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K팝이다. 작품에서나마 연극과 K팝을 동급으로 만들었다"고 웃었다.
한국에서 눈물 짜내는 신파는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열풍에서 보듯 K신파의 위력은 세다.
"신파적 요소가 강한 드라마를 보면 몰입하지 못했던" 정 연출 역시 창작 경험이 쌓이면서 신파에 대한 입장이 부정에서 유보, 지금은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신파극의 역사, 신파성 등을 면밀히 검토하다 보니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그는 '국뽕 신파'는 여전히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가족주의, 동물, 퀴어 신파는 즐기는 편이지만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영웅이나 국가를 찬미하는, 애국심 고취를 위한 신파는 동의하기 힘들어요."
정진새 연출. 서울문화재단 제공 신파는 한국의 고유한 극 문화다. 극중 신파를 굳이 K신파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너도나도 'K'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이나 국위 선양과는 거리가 먼 연극에 K를 붙여 자조하면서 이러한 분위기를 비판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출신 여성 배우 베튤이 포함된 신파 트리오가 입찰 과정의 시연 형식으로 신파를 재현하는 극중극은 이 연극의 관람 포인트다. 한국연극 100년사와 K팝까지 다양한 시간을 녹여냈다. 극중극에는 신파적 요소와 전형성을 벗어난 요소가 섞여 있다.
정 연출은 "신파적인 장면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나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눈물이 난다"며 "베튤이 국민배우급 남성 연기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이순신 역을 적극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훼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베튤 역시 "6살 때 한국으로 이주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만 외모 때문에 배우로서 맡는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배우가 신파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은 국뽕 아니면 불쌍한 외국인 노동자"라며 "틀을 깨는 역할을 맡게 되어 쾌감을 느끼고 관객의 반응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신파의 세기'는 신파극일까, 아닐까. 정 연출은 "자기 연민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의 신파극"이라고 했다. "자기 연민은 한국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겪는 울분인 것 같아요. 1987년 민주화 이후 오히려 사회는 퇴보하는데 저조차도 체계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체념하고 자조할 뿐이죠."
서울문화재단 제공 연극의 영어 제목이 'The scene far from the 20th century'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 연출은 "한국이 경제·사회적으로 성장해서 더 이상 질질 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20세기적인 신파에서 멀리 달아나고 싶었지만 어떤 부분은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시대 망령 같은 느낌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연극은 신파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신파를 뒤에서 이용하거나 권력의 도구로 삼는 존재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