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촬영감독. Matt Kennedy 제공'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 '아가씨' 등 박찬욱 감독의 든든한 파트너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촬영감독 중 한 명이 바로 정정훈 촬영감독이다. '신세계'(2012) 이후 그는 한국 촬영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로 향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정 촬영감독은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 '그것' '호텔 아르테미스' '좀비랜드: 더블탭'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언차티드' 등의 영화는 물론 디즈니+ 시리즈 '오비완 케노비' 등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까지 장르와 플랫폼을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그는 한국 출신 촬영감독으로는 '최초'로 미국촬영감독협회(American Society Of Cinematographers·ASC) 정식 회원이 됐다. 전·현직 ASC 회원의 추천과 회원 투표를 거쳐 선정되는 만큼, 그의 노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가 새롭게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작품은 '웡카'(감독 폴 킹)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란 소설과 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익숙한 '웡카'의 달콤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정 감독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지난 23일 화상으로 만난 정 감독으로부터 '웡카'의 구현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전 세계 화두로 떠오른 '영화'라는 산업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들어봤다.
외화 '웡카'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전 세계가 사랑하는 '웡카', 정정훈의 손으로 구현되다
▷ 처음 '웡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어떤 영화적인 매력을 느꼈나? '웡카'는 가족들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다. 미국에서 '웡카'는 아직도 부모들이 아이들 잘 때 많이 읽어주는 이야기라고 하더라.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고민하고 있었을 때, '언차티드' 루벤 플레셔 감독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무슨 작품을 보고 있냐고 해서 '웡카'라고 했더니, 자기 딸들을 위해 찍어달라고 해서 바로 하게 됐다. (웃음)
▷ 요즘 정말 핫한 배우인 티모시 샬라메가 웡카 역을 맡았다. 티모시는 어떤 배우였나? 티모시는 기계적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는 배우다. 그의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 잡느냐에 따라 수천 가지 표정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오묘하다. 그래서 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찍었을 뿐인데 마치 촬영을 잘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웃음)
외화 '웡카'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웡카'는 드라마와 판타지 동화 그리고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된 영화다.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과제였던 것, 촬영하며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이었나? 가끔 촬영만 보이거나 그 안에서 쓰이는 조명만 훌륭하고 이야기와는 동떨어지게 만드는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관객들이 진짜라고 믿게끔, 거부감 없이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데 중점을 뒀다.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스타일을 넘나드는 게 자연스럽게 전환되길 바라며 촬영했다.
▷ 이번 영화에서 사용한 카메라와 주로 사용한 렌즈는 무엇이었나? 카메라는 아리(Arri) S35라는 디지털카메라를, 렌즈는 아나모픽은 아폴로(Xelmus apollo primes)와 쿠크(Cooke Anamorphic/i) 2종류와 스피리컬 렌즈 등 여러 렌즈를 섞어서 사용했다. 왜냐하면 굉장히 최단 거리의 포커스를 요구하는 장면이 많았고, 작화적으로 부드럽게 화면을 표현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또 굉장히 아날로그적으로 보이길 원했기에 거기에 맞는 렌즈들을 썼다.
외화 '웡카'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웡카'의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빛의 설계는 어떻게 해나갔는지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생각할 때 '웡카'는 따뜻한 이야기가 돼야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따뜻하게 보이게끔, 나름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가슴이 따뜻한 조명이 되는 데 중점을 뒀다. 반면 한 색깔로 조명을 하다 보면 지루해질 수 있으니 적절한 컬러를 섞되, 특별한 장면을 빼놓고는 너무 영화적이거나 인위적인 생각이 안 들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설계하려 했다.
▷ '웡카'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웡카와 누들이 동물원을 나오면서 부르는 노래로 시작되는 뮤지컬 시퀀스였다. 해당 시퀀스를 위해 폴 킹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감독이 특히 그 장면을 굉장히 따뜻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 동물원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조금 더 보여주면 좋겠다, 하나의 아름다운 무대처럼 위에서 약간 스포트라이트처럼 설정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또 어둡지만 어둡지 않게, 사실적이지만 무대적으로 보이도록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영화를 보면 왜 그런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게 될 거다.
외화 '웡카'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 '웡카'를 작업하면서 가장 도전적인 지점과 작업을 마무리하고 난 뒤 얻은 보람 내지 성취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웡카'는 버라이어티하다. 캐릭터도 많고, 캐릭터들이 다 서로 얽혀 있다. 물론 웡카가 가장 구심점이지만, 절대 혼자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 것들을 유기적으로 잘 부드럽게 효과적으로 보이게끔 한 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날씨 역시 큰 도전 중 하나였다. 날씨 변덕이 심한 런던에서 촬영하는데, 많은 장면을 야외 세트에서 찍었다. 같은 장면이라도 해가 쨍쨍하고 비가 내리고 어두워지는 걸 한 날씨처럼 보이게 톤을 맞추는 데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내가 볼 때는 어떤 점이 굴곡이 있는지 보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부드럽게 넘어간다고 보일 때 보람을 느꼈다.
정정훈 촬영감독.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정정훈이 생각하는 '촬영감독'의 의미
▷ '웡카'는 할리우드 작가·배우 파업 이후 처음으로 개봉한 작품인데, 혹시 업계나 극장 반응 차이 혹은 할리우드의 변화를 체감하는 게 있나? 극장에 가보면 '오직 극장에서만 볼 수 있다'는 문구를 많이 본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닌 극장에서 영화를 보길 원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 확실히 영화는 큰 화면에서 보면 느낌이 다르다. '웡카'도 그렇고 '올드보이'가 10주년을 맞이해 재개봉했을 때 나도 극장에 갔는데 마지막 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이런 움직임이 한국에서도 일어나면 좋겠다.
▷ 사실 한국은 여전히 극장이 침체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밖에서 보기에 한국 영화계의 부진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다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훌륭한 OTT 작품이 많기에 관객들이 극장에 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게 가장 문제라고 본다. 답이 없는 문제지만, 제일 중요한 건 좋은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거다. '서울의 봄'처럼 영화적인 완성도와 이야기에 대한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극장에 오는 것 같다. 서로서로 다 노력해야 할 거 같다.
▷ 어느덧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지 만 10년이 지났다. 지난해 10월에는 미국촬영감독협회 (ASC) 회원이 됐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여기서 어떻게 10년을 버텼는지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이방인이 아니라 현지에서 (촬영감독이라고) 인정받은 거 같다. 그런 점이 달라진 것뿐이지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앞으로의 10년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크게 달라지도록 더 노력해야겠다.
정정훈 촬영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들. 다음 영화 제공▷ 혹시 할리우드에서 일하며 꼭 한 번쯤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감독이 있을까?
특별히 작업해 보고 싶은 감독보다는, 나를 잘 이용할 수 있는 감독과 일하고 싶다. 어떤 감독들은 단순히 기술직으로 촬영감독을 대할 때가 있는데, 그런 작업은 즐겁지 않을 때가 많다. 이야기 하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카메라를 돌리고 조명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하고,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잘 캐치해 줄 수 있는 감독과 일하고 싶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그런 훌륭한 파트너였다.
▷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촬영감독'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직업이며, 영화에서 촬영감독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촬영감독은 너무 자기 욕심만 있어선 안 되는 직책인 거 같다. 왜냐하면 훌륭한 연출, 훌륭한 스토리와 배우, 의상, 미술, 분장, VFX 등을 적절하게 좋은 앙상블로 스크린에 표현해 주는 게 내 역할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이 돼야 하니 너무 욕심이 많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순히 기술자가 아니라 감독이 가진 생각을 나타내주려면, 나도 감독만큼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감독의 생각을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의지하고 끌어나갈 수 있는 사이가 돼야만 한다. 난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데, 가끔은 그 실없는 소리 속에 나도 모르게 좋은 생각을 담을 때가 있다. 이런 날 잘 알고, 잘 이용하면 좋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