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집단행동에 나선 전공의들이 2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대한전공의협의회 2024년 긴급 임시대의원총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박종민 기자"(의사가운을 입는 게 오늘로)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다들 입고 회의를 하기로 했다. 이 사안이 1년 이상도 갈 수 있다고 본다."(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 2월 20일) 정부의 '의대 2천 명 증원'이 불씨가 된 의료공백이 지난 20일로 만 석 달을 채웠다.
일수를 세는 기준점은 통칭 '전공의'라 불리는 인턴·레지던트들의 대규모 현장 이탈이다.
사실 사태 초반만 해도 이 정도 장기화를 예상한 시각은 많지 않았다. 수련병원을 대거 빠져나온 2월 20일 마라톤 회의 후 '증원 전면 백지화' 등을 정부에 요구한 전공의들은 계절이 바뀌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최근 법원의 의대 증원·배분 집행정지 신청 각하·기각과 관련해 일부 전공의 대표가 '대한민국의 법리가 무너져 내렸다'며 강한 불만을 쏟아냈지만, 대다수 전공의들은 병원 밖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들과 '같은 배'를 탔다고 볼 수 있는 의과대학 교수 측 법률대리인(법무법인 찬종 이병철 변호사)이 "도대체 너희들은 뭐냐. 유령이냐"고 질타하며 적극적 대정부 투쟁을 주문할 정도다.
하지만
'수련공백 3개월'을 맞은 전날이 상당수 전공의들의 복귀 마지노선이었음을 감안하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집단행동'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들의 미복귀는 단순한 개인별 진로 변경을 넘어 국가 차원의 전문의 수급난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보건의료 인력 운용 책임이 있는 당국에 치명타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CBS노컷뉴스는 법정 공방 끝에 2025학년도 의대 증원 확정이 초읽기에 들어간 지금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의·정 갈등의 주요 타임라인을 짚어 봤다.
'2천 증원' 발표 2주 만에 전공의 사직…차관·대통령 모두 '대화 빈손'
원래 정부가 의대 증원을 공식화한 시점은 지난해 10월 19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충북대에서 '필수의료혁신 전략회의'를 주재하며 2025학년도 적용을 목표로 의대 입학정원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엔 정부가 의대의 수용역량·입시변동 등을 고려한 '단계적 증원'을 공언한 만큼 처음부터 현원 대비 65%에 달하는 '2천'이란 숫자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작년 1월 26일 의료계와의 일대일 협상 테이블(의료현안협의체)을 재개한 정부는 약 1년여 간 의협과 논의를 이어오다
올 2월 6일 '의대 2천 증원'(3058명→5058명)을 발표했다. 고사 위기에 처한 필수의료, 특히 지역의료 인프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2035년까지 1만 명의 의사를 확충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셈법이었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3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20일 대구 한 대학병원 학생 의사실이 조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발표 당일 아침 열린 28차 협의체 회의를 4분 만에 박차고 나간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집행부 사퇴와 동시에 '의대정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대한의사협회는 "합리적 협의 과정이 전혀 없었다"며 애당초 2천이란 수치는 언급조차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전임 정부 때도 의대 증원을 좌초시킨 경험이 있는 전공의들은 2월 19일 이른바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를 중심으로 사직 행렬에 나섰다. 한발 앞서 집단사직서 수리금지를 명한 정부는 업무개시, 진료유지 명령 등을 연이어 발동했지만, 'MZ세대' 의사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정부는 2월 29일을 복귀 데드라인으로 제시하며, 미복귀 시 사법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했으나 메아리는 없었다.
말일 당일에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이 서울 모처에서 '깜짝 제안'한 전공의와의 대화도 한 자릿수 전공의만이 응한 채 소득 없이 끝났다. 현원 기준 1만여 명으로 전체 의사의 10%도 안 되는 전공의가 원내 의사의 40% 이상인 상급종합병원들은 약 4주 만에 빈약한 실상을 드러냈다. 입원·수술 등을 절반 이상 감축하며 경영난에 봉착한 빅5 병원 등은 '비상경영'을 선언하며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배로 늘렸다.
제자인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워온
의대 교수들은 잦은 당직에 '번아웃'을 호소하며 3월 25일을 전후해 사직서 제출에 동참했다. 같은 달 26일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의 제42대 의협 회장 당선은 강(强)대강 대치의 심화를 알렸다. 임 회장은 전공의나 의대생 등 '어떤 의사라도 정부에 의해 불이익을 겪을 시, 즉각 총파업' 노선을 천명했다.
그 사이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유연한 처분'을 주문한
윤 대통령이 지난달 4일 전공의를 대표하는 박 비대위원장과 단독 면담을 가졌으나, 결론은 파국이었다. 만남 직후 박 위원장은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없다'란 단 한 줄의 후기를 남겼다.
'法대로' 정부 판정승에도 전공의 등 불복…"내년까지 갈 것"
지난 9일 오전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인이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이 생중계되고 있는 텔레비전을 지나치고 있다. 연합뉴스대화가 실종된 자리엔 '소송'만이 남았다. 정책 정당성 및 추진 여부 판단이 사법부로 넘어간 것이다. 의료계와 정부 모두 한 치의 양보 없는 대치전을 벌인 결과다.
정부는 지난달 19일 일부 국립대 총장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내년도에 한해 대학별 의대 증원분을 최대 절반까지 감축키로 했지만, 의료계가 '증원 원점 재검토'를 고수하며 합의에 근거한 조정은 무산됐다. 정부는 정부대로 '이 이상의 양보는 불가능하다'며 25일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했다.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구체화하겠다면서 정작 소통상대(의사)가 빠진 논의체 발족을 강행한 것이다.
의료계는 송사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의대 증원·배분 처분 효력을 멈춰달라는 집행정지 신청사건을 맡은 항고심 재판부는 정부 측에 '2천 명 증원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고, 원고인 의대생·교수 등은 지난 13일 정부가 법원에 낸 자료 일체를 공개하며 여론전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2천 증원'이 의결된 정부 산하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졸속 진행됐다거나, 증원분 배정을 결정한 정원배정심사위 회의록이 없다는 점 등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공세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다만,
서울고법은 지난 16일 기각·각하 결정을 내리며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증원에 따른 교육 부실화 우려 등 의대생 측의 손해가 예상된다고 인정하면서도, 의료개혁의 필수 전제인 의대 증원이 중단됐을 때 사회적 피해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의사 증원'의 법적 명분을 확보한 정부는 한숨 돌리게 됐지만, 이 같은 결정이 사태 종결을 뜻하지 않는단 게 문제다.
즉각 재항고한 의료계는 대법 판단이 나올 때까지 승복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의대 증원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정부의 자평과 달리, 전공의들도 돌아올 기미가 없다. 전문의 자격 취득을 위한 '복귀 디데이(D-day)'인 전날에도 현장에 별다른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복지부에 따르면,
주요 수련병원 100곳의 레지던트는 9996명인데 이 중 16일 기준 출근 인원은 617명(6.2%)에 불과하다. 휴가·휴직 등 '부득이한 사유'를 소명하면 이탈기간 일부를 수련기간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유화책에도 싸늘한 반응이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그간 정부가 이들을 '대화 상대'가 아닌, '개혁 추진의 걸림돌'로 간주했다고 본다.
서울아산병원 등을 수련병원으로 둔 울산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는 전날 총회 후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어 내년까지도 사태 해결이 어려울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교수의 당직 후 휴진 보장, 외래 조정 등 전체적인 업무량도 조정하기로 했다며 "현 상황에서 의대 증원을 강행할 경우 초래할 한국의료 파탄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지역·필수의료 회복'이란 본(本) 목적을 달성하려면, 전공의·의대생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인책 마련과 함께 '의사 확충'에 가려진 정책패키지 면면을 세밀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의료기관 응급실에서 근무 중인 한 전문의는
"전공의가 되돌아오지 않을 1년 동안 각 병원은 전문의 중심으로 의료를 제공하고 수련환경을 제대로 개선해야 한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가 할 일은 '제대로 된 전문의'를 길러내는 병원이 되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