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관련 입법청문회에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해병대 채 상병 사건에 연루된 임성근 전 1사단장을 둘러싼 구명 로비 의혹 공방이 격화하고 있다. 구명 로비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담긴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거세지고 있지만, 당사자들이 의혹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성근 구명설'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녹음파일 속 인물은 자신이 말한 'VIP'가 대통령이 아닌 해병대사령관을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VIP에게 얘기할 테니 (임성근) 사표 내지 마라"…녹취 공개
11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투자자문사 블랙펄인베스트먼트 이모 전 대표는 지난해 8월 9일 공익제보자인 A변호사와의 통화에서 임 전 사단장 거취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씨는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에서 '2차 주가조작' 컨트롤타워 역할로 지목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재판에서 김 여사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것은 맞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해 8월 9일 A변호사와의 통화에서 "이 XX(임 전 사단장) 사표 낸다고 그래가지고 내가 못 하게 했거든 그래 갖고 B가 문자를 보낸 걸 나한테 포워딩(전달)했다"며 "그래서 내가 'VIP한테 얘기할 테니까 사표 내지 마라', 왜 그러냐면 이번에 아마 내년쯤 발표할 것이다. 해병대(사령관) 별 4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B씨는 이 대표와 A변호사 등과 함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골프 모임을 논의했던 인물로, 전 경호처 직원이다. '해병대 별 4개 만들 것'이란 말은 현재 해병대사령관의 계급은 별 3개(중장)인데, 별 4개(대장)로 계급을 올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에 A변호사가 "위에서 그럼 (임 전 사단장을) 지켜주려고 했다는 것인가요? VIP 쪽에서?"라고 재차 묻자, 이씨는 "그렇지. 그런데 언론에서 이 XX들을 하네"라고 답한다.
이 대표는 또 올해 3월 4일 A변호사와의 통화에서도 "쓸데없이 내가 거기 개입돼 가지고. (임 전 사단장이) 사표 낸다고 할 때 내라고 그럴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씨 등의 대화는 채 상병 사망 사건 초동 수사결과를 놓고 윤 대통령의 질타 이후 대통령실에서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이 대표의 '구명 로비'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구명 로비 뒷받침?…임성근 "주가조작 공범과 일면식도 없어"
지난달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관련 입법청문회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과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출석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하지만, 이들의 대화가 구명 로비 의혹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황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 전 사단장은 지난해 7월 28일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틀 뒤인 30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은 임 전 사령관을 보직해임하고 분리 파견을 보낸다. 하지만 다음날인 31일 오전 윤 대통령이 해병대수사단의 수사결과를 질타한 이후 보직해임과 분리파견이 취소되고 다시 사단장으로 복귀한다.
이는 임 전 사단장의 거취가 7월 28일에서 31일까지 나흘 만에 정리되는데, 이때까지는 임 전 사단장의 사의표명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외부로 처음 알려진 건 8월 2일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결국 이씨가 임 전 사단장을 구명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면, 7월 28일에서 31일 오전 사이에 이뤄졌어야 한다는 반박이다.
임 전 사단장도 입장문을 통해 지난해 7월 19일(채 상병 사망 시점)부터 8월 1일까지 B씨로부터 전화를 받은 기억은 없고, 8월 2일 이후 안부를 묻는 수준의 문자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B씨의 통화내역을 확인해 보라면서 이 대표와는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이라고 강조했다.
이씨와 A변호사 간 통화가 이뤄진 시점은 8월 9일이다. 이미 채 상병 사건기록이 경찰에서 회수되고 임 전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내용이 세간에 알려진 뒤다. 이씨가 자신의 인맥과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외부에 거짓으로 말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가조작 공범 "VIP는 해병대사령관"…민주당 "스모킹건"
또한 이씨는 언론 등에 "VIP는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김 여사의 번호도 모른다"면서 구명 로비 의혹을 부인했다. 또 이번 통화 녹음파일이 공개된 것에 대해 A변호사를 지목해 "본인이 정말 공익제보자라면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 초기에 제보했어야 하지 않느냐"며 "일부 여당 의원이 A변호사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니 1년 전 녹취록을 앞뒤 다 자르고 제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씨가 VIP는 해병대사령관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VIP는 통상 대통령을 지칭하고 군 내에서 사령관을 VIP로 부르는 예가 흔하지 않아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용산 대통령실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측도 이씨와 관련한 구명 로비 의혹을 부인했다. 대통령실은 "근거 없는 주장과 무분별한 의혹 보도"라고 일축했고, 이 전 장관 측은 "누구로부터도 해병 1사단장을 구명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여권인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도 지난 3일 A변호사가 박정훈 대령 측 변호인단에 있는 점을 지적하며 "해당 대화방 캡처본을 기획·제작하고 입법청문회 질의부터 보도까지 잘 짜인 각본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 측은 이씨 등의 통화 녹취가 '수사 외압' 의혹의 결정적 증거라며 공세 수위를 강화하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은 전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녹취록은 대통령 격노 후 안보실 등이 총동원돼 '임성근 구명 외압'을 행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풀어낼 강력한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라고 주장했다.
박홍근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VIP의 정체가 김 여사라면 해병 순직 사건의 성격은 '윤 대통령 부부의 수사 외압과 국정농단 게이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수처, 이씨의 지인 참고인 소환 조사…추가 로비 정황 관건
연합뉴스한편, 사건을 수사 중인 고위공직자수사처(공수처)는 이씨와 A변호사 간 통화 녹음파일을 확보해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는 이씨의 지인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면서 '이 대표가 지난해 7~8월쯤 임 전 사단장을 구명했다고 자랑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수처가 이씨의 구체적인 구명 로비 정황을 추가로 확보한다면, 대통령실 수사 개입 의혹이 한층 더 짙어지면서 수사는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다만 공수처는 지난 9일 이씨를 둘러싼 녹음파일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수사가 진행 중으로 일체 알려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