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부여당이 처리하고자 하는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규정한 382조의3이다. 이 조항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로 규정돼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조문 가운데 '회사를 위하여'를 → '회사 및 주주를 위하여'로 고쳐 회사의 경영진이 회사뿐 아니라 주주에 대해서도 책임지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려고 한다. 동일한 내용으로 이미 2025년 3월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의를 요구하는 바람에 법안 자체가 폐기됐다.
당 대표 시절 이 법안 처리를 주도했던 이재명 대통령은 21대 대통령선거 때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자 마자 상법 개정안을 재발의 입법을 성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공약 대로 이재명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다시금 상법 개정안 처리에 시동을 걸고 6월 임시국회 회기 중 법안을 꼭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더불어민주당은 6월 국회 회기 종료일인 오는 4일까지 법안을 처리할 목적으로 재계와 만나 의견수렴을 했고 원내 파트너인 국민의힘과도 법률개정안의 쟁점에 대한 논의를 주고 받고 있다. 그러나, 의견수렴이나 협상을 통한 법률안 변경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여당이 이미 올해 처리했던 법안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재의요구에 막혀 불발됐고 그 사이 시급히 반영돼야 할 사정변경이 발생한 것도 아니란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여권내에는 우리 경제의 체질강화를 위해 가장 시급히 처리돼야할 법안이 기업 경영진이나 대주주 이익을 옹호하는 움직임에 의해, 한 차례 저지당했다는 인식도 있다.
30일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에서 재계와 간담회를 가진 이후 선(先)입법 후(後) 보완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고 원내 의석분포로 볼때 상법 개정안 처리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한국경제의 규모나 위상에 비춰볼 때, 기업의 양대축인 '경영진을 비롯한 대주주'와 소액주주 간의 균형잡힌 역할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일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 개발과 성장논리에 무게중심이 두어졌던 경제제도가 1997년 IMF발 구제금융을 계기로 경영투명성 강화와 기업지배구조 개선 요구 등과 맞물려 변화를 맞게 된다. 바로 상법에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조항을 첫 도입한 것이다. 대주주와 경영진의 사익추구에 의한 폐해가 개선될 중요 계기로 여겨졌지만, 그 충실의무가 회사에 국한되는 바람에 유명무실한 개혁에 그쳤다.
주주에 대한 경영진.대주주의 책임이 회사로만 제한되면서 90년대말 이후에도 그 부작용이 속출했다. 물적분할 후 자회사 상장이나 일감몰아주기, 계열사-관계사 부당지원 등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다. 대기업의 계열사 일감몰아주기와 사주에 의한 전횡과 이로인한 경영상 손실 그에 이은 주가 폭락, 물적분할을 통한 자회사 상장 및 지분 챙기기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들이다.
충실의무가 법에 규정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배주주의 사익추구 관행에는 근원적 변화가 없었다. 가까운 예로 우리 국민 다수가 2020년말 이뤄진 LG화학의 배터리사업부 분할 당시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기억한다.
LG화학 주식을 가지고 있던 소액주주들은 전도유망한 배터리사업부가 떨어져 나가 별도의 회사가 되고 상장해봤자 주식을 배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매수청구권 행사를 통해 투자에서 손을 털고 나올 수도 있지만 배터리사업의 유망성을 아는 주주 누가 타의에 의해 보유지분을 처분하고 나오고 싶어하겠는가?
비단 이 회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2천년대 이후 지금까지 대기업들이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거나 계열사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자회사나 손자회사를 별도로 상장시키는 관행은 이어지고 있다. 소액투자자들은 이런 제도적 미비점에 넌더리를 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국의 정권교체기까지 개미들이 미국장으로 엑소더스에 나섰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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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처리하려는 상법 개정안은 이재명정부의 성장동력 회복 정책 즉, '진짜성장 내지 혁신성장'의 키포인트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 공약이나 국정과제 수립과정에서 확인되는 이재명정부의 경제정책은 AI와 항공우주 등 신성장동력 육성과 자본시장 선진화, 가계-소상공인 지원 등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자본시장 선진화를 이룰 방편으로 도입하려는 주주충실의무나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은 벌써부터 시장으로부터 핫한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이재명정부 출범 후 코스피는 모처럼 활기를 띠면서 3000선에 안착한 후 상승세를 타고 있다. 주주충실의무 도입에 반대했던 국민의힘 마저 여당 시절 당론을 뒤집고 전향적 검토로 입장을 선회한 건 소액주주들의 반응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명확한 경제좌표설정과 속도감 있는 정책 추진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흐름의 형성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재명정부 경제정책의 골간이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재계에서는 여당안대로 입법이 진행될 경우 소송남발과 배임죄를 뒤집어 쓰게되는 상황을 가장 우려스러워 한다. 그러나, 6월 국회내 처리에 나선 여당이 '후 보완' 의사를 밝힌 만큼 재계에서는 바뀐 제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경영관행을 바꾸고 새로운 기준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먼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가 30년 가까이 반쪽 주주책임 하에서 운용돼 왔다면 그만큼 손쉬운 경영방편과 환경에 안주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