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강원 원주 DB프로미 아레나에서 열린 2027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아시아 예선 1라운드 B조 2차전 한국과 중국의 경기에서 승리한 이현중이 하윤기와 포옹하며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1986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스타디움 네가라의 코트는 1월의 무더위보다 더 뜨거웠다. FIBA 아시아컵의 전신인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ABC) 챔피언십 라운드에서 한국과 중국 남자 선수들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은 이날 중국을 74:65로 격파했다. 한국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의 한 점차 승리에 이어 또다시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다. 주역은 '농구대통령' 허재, '쌍돛대' 김유택·한기범 중앙대 트리오였다. '슛도사' 이충희, '전자슈터' 김현준 등 기존 뉴델리 금메달 멤버에 가세한 젊은 피들은 한국 농구 중흥의 선언이었다. 완벽한 신구 조화를 이룬 이 멤버들은 3년 뒤 서울 올림픽에서 중국을 93:90으로 또다시 꺾고 아시아 최강에 오른다.
농구대잔치를 주름잡던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트리오, 한기범 등 기아자동차 농구팀 포스터한국 남자 농구의 성장은 '농구대잔치'라는 토양을 통해 이뤄졌다. 1983년 '점보시리즈'로 출범한 농구대잔치는 매년 겨울을 뜨겁게 달군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였다. 국내 정상의 실업팀과 대학팀이 모두 참여해 자웅을 겨루며 농구 팬들을 열광시켰다. 삼성과 대 전자 라이벌전, 연·고대/고·연대와 중앙대 대학 패권전 등은 수많은 스타와 화제를 낳으며 한국 농구를 인기 절정으로 밀어 올렸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현주엽, 김병철, 전희철 등 대학 스타들은 연예인을 넘어서는 인기를 구가하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말 그대로 한국 남자 농구의 '황금 세대'가 이끈 최고의 전성기였다.
한국 남자 농구는 이에 힘입어 1997년 2월 프로농구리그 KBL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아시아컵 4강전에서 한국의 황금 세대는 오랜 패배의 사슬을 끊고 중국에게 역대 가장 큰 14점차 대승(국가대표 1군 경기)을 거뒀다. 이어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1969년 방콕 대회에 이어 28년 만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컵을 들었다.
2002년 10월 14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에서 중국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IMF 외환위기에 가로막혔던 농구 열기는 2001년이 되자 다시 불타올랐다. 서장훈, 이상민, 문경은 등 기존 스타에 김주성, 김승현, 신기성, 방성윤 등 새로운 황금 세대가 가세했다. 2001-2002 시즌에는 처음으로 100만 관중을 돌파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결승에서 레전드 야오밍이 버틴 중국에게 102:100 2점차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5군 대결이었던 전년 동아시아경기대회에 이은 2연승이었다. 당연하게도 한국 남자 프로농구는 흥행가도를 달렸다. 2011-2012시즌 133만명을 넘어서는 등 15시즌 연속 100만 관중 이상을 동원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2013년 인천 동아시아선수권 결승과 마닐라 아시아컵 예선에서 중국을 연파했다. 여세를 몰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당시 최강 이란을 2점차로 꺾고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금메달을 차지했다. 김주성, 양동근, 김선형, 조성민, 문태종(귀화 선수) 등이 이란전에서 보여준 투혼은 '회광반조'(回光返照), 꺼지기 직전의 가장 밝은 불꽃이었다.
2016-2017 시즌 100만 관중이 깨진 이후 남자 농구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코로나19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국제대회 성적도 참담했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역대 최악인 7위까지 추락했다. 암흑기는 길고도 길었다.
이현중이 지난 8월 14일(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2025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컵 8강 중국과의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FIBA 홈페이지
그렇게 2025년 여름이 됐다. 한국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사우디 제다 아시아컵에 도전했다. 하지만 8강에서 중국에 막혀 탈락했다. 에이스 이현중은 코트를 빠져나가면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3개월 뒤 FIBA 농구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중국을 12년 만에 연파하며 설욕했다. 1차전에서 33득점, 2차전에서 20득점으로 중국을 폭격했다. 2차전은 28년 만에 재현한 14점차 대승이었다.
이현중은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 성정아의 아들이다. 그는 미국 NBA 진출을 목표로 호주의 고교를 거쳐 슈퍼스타 스테판 커리의 모교인 데이비슨 칼리지에 진학했다. -이현중의 별명은 '코리안 커리'이다- 이현중은 NBA 마이너리그인 G리그, 호주 리그에 이어 일본 B리그에서 뛰고 있다. 201cm의 포워드이자 슈터인 이현중은 슛, 어시스트, 리바운드까지 전천후이다. 일본에서는 현재 야투율 58.5%, 3점슛 성공률 48.1%, 경기당 3점슛 3.4개의 미친 활약을 하고 있다. 이현중은 25살, 2000년생이다.
중국과 2차전에선 또 한 명의 괴물이 날뛰었다. 3점슛 6개를 포함해 24득점을 꽂아넣은 가드 이정현이다. 부상으로 불참한 8월 아시아컵의 아쉬움을 씻으려는 듯 날아다녔다. '농구 천재' 이정현은 1999년생이다. 이번 중국전 2연승의 주전은 포워드 안영준(1995년생, KBL MVP), 이승현(1992년생), 센터 하윤기(1999년생)이다. 여기에 부상으로 출전 못한 포워드 송교창(1996년생, 최연소 MVP), 최준용(1994년생, MVP), 슈팅가드 유기상(2000년생)까지 복귀한 스퀴드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FIBA 농구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중국에 2연승을 거둔 한국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연합뉴스대한민국농구협회는 때맞춰 남자 대표팀 감독으로 라트비아의 마줄스 감독을 선임했다.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2028 LA 올림픽 본선 진출이 목표이다.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생까지 Z세대로 세대 교체된 국가대표팀. 젠지(Generation Z)가 젠지(Generation Gold)로서 한국 남자 농구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