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진행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제6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김지은 기자지난 4일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는 평소 출근길 풍경과는 달리 휠체어를 탄 사람들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함께 살고 싶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이들 앞에는 불법시위를 계속하면 퇴거불응죄로 조치할 수 있다는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특정 장애인 단체의 시위로 인해 (열차가) 지연될 수 있다"는 서울교통공사와 경찰의 확성기 소리. 그리고 이 주변을 지나는 한 시민은 "지겨워. 제발 그만 좀 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이날 광화문역에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제67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가 진행됐다. 이들은 오전 9시 20분쯤 5호선 지하철을 타고 국회로 향했다. 2026년도 예산안에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전장연 시위로 올해만 지하철 무정차 통과는 최소 16회, 시민들의 불만도 늘어났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2023년부터 지난달까지 접수된 전장연 관련 민원은 총 6598건인데, 올해 11월 한 달 동안만 1644건이 몰렸다.
지난달 18일 오전에는 4호선 길음역과 동대문역부터 동작역,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탑승 시위를 진행해 열차가 무정차 통과 및 지연 운행하는 일도 있었다.
전장연 박경석 상임 공동대표는 4일 여의도로 향하는 5호선 지하철 안에서 "전장연이 출근길 지하철에 더 이상 타지 않도록 해 달라.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25년 지났는데 이동권은 아직…택시 최대 12시간 기다려"
전장연은 올해 4월 21일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1년 만에 재개했다. 비판적인 여론을 받아들여 1년 동안 지하철을 타지 않고 기다렸지만 장애인의 권리는 나아지지 않아서다. 박 대표는 "1년을 기다리며 장애인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국회에 얘기했지만 관련 법안을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서의 장애인 이동권은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사고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애인 이동권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앞에서 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박 대표는 "25년이 지났지만 기본적인 선이 0이라면 장애인은 마이너스(-)에서 살고 있다"며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일을 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남아 누군가에게 부담이 된다. 그런데 장애인은 이동도 못 하고 교육도 못 받아 일을 할 수가 없다. 일단 교통수단부터 떨어져서 죽지 않고 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가장 첫 번째 요구가 이동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동권 문제는 대중교통부터 해운, 항만, 시외버스, 고속버스부터 건물에 대한 접근권까지 폭넓은 문제다. 이 중에 시외버스는 장애인들이 1대도 이용을 못한다"며 "우리나라는 가로로 질러가는 교통수단이 별로 많지 않다. 그것이 고속버스, 시외버스인데 결국 장애인들은 가로로 이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전장연은 또 장애인 콜택시 같은 특별교통수단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장연은 지난 2일 성명에서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애인이동권 보장은 아득하기만 하다"며 "전국을 통틀어 차량은 4896대에 불과해 1613만 명의 교통약자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라고 주장했다. 특별교통수단 차량 한 대당 운전원 수는 올해 기준으로 지자체 평균 1.1명이다. 인력이 부족해 24시간 운행이 어려운 지역들이 많다.
박 대표는 "심한 경우에는 일주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또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려고 해도 차량을 기다리는 시간이 평균 40분이다. 비장애인들이 카카오택시를 부르면 5분도 길지 않나. 장애인 콜택시는 최대 많이 기다린 시간이 12시간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탈시설로 나아갈 환경도 부족한 상황이다. 전장연은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2014년과 2022년 두 차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지속적인 시설화와 실효성이 부족한 탈시설 정책을 우려하며, 탈시설 정책 추진 강화 등을 권고했다"며 "윤석열 정권은 장애인 탈시설 권리를 삭제하고, 정책을 후퇴시켰다"고 비판해 왔다.
"무응답이 더 무서워"…또다시 지하철을 탈 수밖에
전장연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외에도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하는 선전전, 다이인(die-in·죽은 것처럼 드러눕기), 포체투지(기어가는 방식의 오체투지)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변화는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전장연은 또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하철을 타야, 욕이든 칭찬이든 관심을 받는 것이다. 관심을 받아야 그들의 주장이 세간에 오르내리게 된다. 박 대표는 "지하철 탑승이라는 이런 방식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논쟁보다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을 적어도 시민권으로 인정해 준다면 (탑승 시위를) 할 이유가 없다"며 "25년을 외쳐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데 다른 곳으로 가서 해결된다고 하면 당장 가겠다"고 말했다.
지난 2일 국회는 727조 9천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확정했다. 기획재정부는 최중증장애인 가산급여 인상(63억 증액) 등 취약계층별 맞춤형 지원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장연은 장애인의 이동권과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전장연은 지난 3일 성명을 통해 "여야가 합의한 2026년 예산안에서는 오히려 장애인거주시설 기능보강 예산이 증액되었고, 장애인이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감옥 같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는 또다시 외면당했다"고 밝혔다. 확정된 2026년 예산안의 장애인거주시설 기능보강 예산은 정부안보다 34억 1천만 원 증액됐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내년도 예산안의 특별교통수단은 차량도입비 145억, 운영비 555억 9천만 원으로 총 700억 9천만 원이다. 특별교통수단 운전원 인건비는 0원이다. 국토교통부는 운전원의 인건비는 지방 사무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지방 사무가 아닌 중앙 정부의 책임으로 인건비를 예산안에 반영해달라는 입장이다.
지난 4일 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국회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 또 전장연은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기재부와 소통할 자리도 부족했다고 호소한다. 박 대표는 "(기재부 장관 참석) 행사장에도 가고 기재부 앞에서 천막도 치고 하면서 기재부 장관을 두 차례 정도 만났다. 30분 정도 시간을 정해놓고 설명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는 가버렸다. 장애인 권리 예산에 대한 요구에 답을 달라고 했지만 답변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매달려도 아예 응답 자체가 없는 것"이라며 "이게 더 무겁고 무섭다"고 덧붙였다.
전장연은 또 출근길 지하철에 탈 계획이다. 박 대표는 "정치인과 언론이 갈라치기 한 말을 현장에서 시민들이 스펀지처럼 흡수해 그대로 고함 소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시위 현장은 많이 공포스럽기도 하다"면서도 "지나가다가 초콜릿을 툭 주면서 '지지자다' 하는 그 한두 명의 말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힘을 준다"며 웃었다.
전장연은 새해 1월 2일 시청역에서 '제6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한다. 박 대표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기본 원리가 실현될 때까지는 계속 투쟁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