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테크노밸리 전경. 성남시 제공"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매일 주차전쟁이에요", "집값이 너무 비싸서 장거리 출근해요", "출퇴근 시간마다 지하철이나 버스타기 무서워요", "주변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요."
지난 31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서 만난 직장인들의 목소리다.
판교는 국내 대표 혁신 업무지구로 성장했지만 교통·주차·돌봄·주거 인프라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수요가 몰린 도시가 흔히 겪는 문제지만, 고용 규모와 젊은 인구 비중이 큰 판교에서는 생활 인프라 부족이 곧 도시 지속가능성 문제로 번지고 있다.
전년 대비 6%↑…판교테크노밸리 임직원 8만 시대
판교테크노밸리 실태조사 결과. 경기도 제공31일 경기도가 발표한 '판교테크노밸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판교테크노밸리 임직원은 2021년 7만1967명에서 2025년 8만3465명으로 5년 연속 증가했다.
특히 2023년에는 전년 대비 7.2% 증가하며 상승 폭이 두드러졌고, 2024년에는 증가세가 다소 주춤했다가 제2판교의 본격적인 입주가 시작되면서 2025년에 다시 큰 폭으로 늘었다.
여기에 성남금토 공공주택지구 내 약 6만㎡ 부지에 연면적 44만㎡ 규모로 조성되는 '제3판교 테크노밸리'까지 오는 2030년 마무리되면 판교 임직원 수는 1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연령 구조 역시 판교의 특성을 보여준다. 2023년에는 30·40대 비중이 69.6%로 가장 높았지만, 2024년에는 20·30대 비중이 60%로 30·40대를 앞질렀다. 2025년에도 20·30대 비중은 60.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임직원 증가 못 따라가는 '주거·교통'
판교테크노밸리 전경. 성남시 제공문제는 '일자리의 성장'과 '생활 기반의 성장' 속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제2판교 활성화에 필요한 정책을 묻자 '대중교통 접근성 강화'가 5점 만점에 4.56점으로 가장 높았고, '주차 문제 개선'도 4.25점으로 뒤를 이었다.
성남시는 판교 접근성 강화를 위해 시흥사거리 분당~내곡 방향 진출로 신호 운영 개선, 제2테크노밸리 입구 삼거리 좌회전 대기 차로 연장, 제2테크노밸리 내부 운행 버스 확대 및 노선 신설 등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대 대중교통 혼잡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교통난 해소의 핵심 대안으로 꼽히는 지하철 8호선 판교 연장(모란역~판교역 3.78㎞) 사업도 2023년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지연됐다. 성남시는 최근 경제성 보완을 통해 경기도에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 사업 선정을 요청했지만, 추진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주차난 역시 직장인들의 일상을 압박하고 있다. 판교에 운영 중인 공영주차장은 모두 3곳, 1140면에 불과해 8만 명에 이르는 임직원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도보 출퇴근이 가장 확실한 대안이지만, 분당신도시 재개발·재건축과 주택 공급 부족으로 집값이 급등하면서 '판교에서 일하지만 판교에서는 살 수 없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실제 2025년 성남시 분당구 아파트 가격은 전년 대비 18.21% 상승했고, 전·월세 가격도 매월 1% 이상 오르고 있다.
IT기업에 재직 중인 위모(41)씨는 "집값 부담 때문에 하남시에서 출퇴근하고 있는데, 자차를 이용하자니 주차가 걱정되고 대중교통은 출근길부터 사람이 너무 많아 진이 빠진다"며 "결국 새벽에 출근해 사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생활이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커지는 돌봄 공백…맞벌이 부부 '직격탄'
성남시다함께돌봄센터. 성남시 제공교통과 주거 문제 못지않게 판교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또 하나의 구조적 문제는 '돌봄 공백'이다. 임직원 구성에서 20·30대 비중이 60%를 넘어서며 결혼·출산 연령대가 빠르게 유입되고 있지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판교 일대 국공립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이미 포화 상태다. 제2판교와 인근 업무시설 주변에는 직장 연계형 어린이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상당수 맞벌이 부부가 분당·수정·중원구까지 이동해 아이를 맡기는 실정이다. 출근 전 돌봄 이동과 퇴근 후 장거리 픽업이 반복되면서 육아 부담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야간·긴급 돌봄은 사실상 사각지대다. IT·게임·콘텐츠 기업이 밀집한 판교의 특성상 유연근무와 야근, 프로젝트 단위 근무가 잦지만 이에 대응할 공공 돌봄 인프라는 거의 마련돼 있지 않다. 이로 인해 돌봄 문제는 출산 기피와 경력 단절, 조기 퇴사로 이어지며 판교의 인재 유지에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워킹맘 강모(38)씨는 "아침마다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분당까지 이동한 뒤 다시 판교로 출근하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체력도, 마음도 한계에 왔다"며 "야근이나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길 때마다 돌봄을 해결하지 못해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10만 임직원 시대 '코앞'…업무 중심 아닌 인프라 확충 필요
제3판교 테크노밸리 조감도. 경기주택토지공사 제공 판교는 국내를 대표하는 혁신 업무지구로 자리 잡았다. 일자리는 꾸준히 늘었고, 기업과 청년 인구도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다만 도시의 빠른 성장에 비해 생활 인프라 확충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다.
전문가들은 제3판교까지 조성이 마무리돼 임직원 규모가 10만 명에 이를 경우 이 같은 생활 인프라 문제가 판교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창무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는 "판교는 일자리를 먼저 키운 뒤 생활 인프라를 단계적으로 보완해 온 전형적인 업무 중심 개발 모델"이라며 "1·2·3 판교테크노밸리가 각자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구조지만, 개별 구역을 넘어 교통·주차·돌봄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