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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불안해서 어디 못가" 설날에도 집 지키는 정릉골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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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르포]"불안해서 어디 못가" 설날에도 집 지키는 정릉골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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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파편·쌓인 쓰레기로 가득한 방치된 골목길
    철거 예고 속 불안한 설…집 지키는 정릉골 주민들
    세입자·집주인 압박…"언제 나갈지 몰라 짐 쌌다"

    재개발을 앞둔 정릉골 판자촌의 철거 대상인 집의 모습. 박인 기자재개발을 앞둔 정릉골 판자촌의 철거 대상인 집의 모습. 박인 기자
    지난 17일 재개발을 앞둔 서울 성북구 정릉골 757번지. 바닥에는 깨진 유리와 부서진 지붕 잔해, 쓰레기들이 그득했다. 촘촘히 붙어 있는 평범한 주택 대문마다 '경고문', '철거대상' 등이 적힌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밖에서 자물쇠와 쇠사슬로 잠근 집들이 골목마다 넘쳤다. 2020년 그려진 벽화는 어느새 부서져 파편만 남았다.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자 작은 교회와 절, 그리고 몇 채의 주택이 더 나타났다. 이 가운데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많지 않다. 수십 년간 정릉골을 지켜온 주민들의 불안은 최근 더 커졌다. 재개발조합장이 "최대한 빨리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이후 빨간 글씨로 '철거 예정 구역'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김우권(65)씨는 줄곧 이 일대에서 살다가 약 20년 전 이 집에 정착해 세를 내며 살아온 세입자다. 사실상 원주민이나 다름없는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였다.

    이웃들과 번갈아 구청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집을 비운 사이 공무원들이 들어와 '부동산점유이전금지가처분'이라고 적힌 A4용지를 붙여 놓았다. 떼어낼 수도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집을 비운 틈에 문을 열고 들어와 해당 서류를 부착한 사실이 매우 불쾌해 항의했지만, "법대로 했다"는 답을 듣고 온몸의 힘이 빠졌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설 명절에도 어디 가지 않고 정릉골 집을 지킬 예정이다. 김씨 부부는 "다음 단계는 강제 철거일 수도 있다"며 "(집을) 오랫동안 비우면 뭐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우권씨 집에 붙은 북부지법 고시. 박인 기자 김우권씨 집에 붙은 북부지법 고시. 박인 기자
    본격적인 재개발 추진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주민은 김씨만이 아니다. 마을 꼭대기쯤 사는 박수영(64)씨는 "공무원들이 집에 A4용지를 붙이고 간 날, 짐을 이미 다 싸놨다"며 "언제 나갈지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 살고 있다"고 애써 웃어 보였다.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이웃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홀로 산 지 어느덧 20년이 된 박씨는 가족 같은 이웃들을 떠나보낸 뒤 명절이 더욱 외롭다고 했다. 이웃들은 늘 박씨와 음식을 나눴지만, 재개발조합과 집주인 등의 압박에 밀려 결국 삶의 터전을 떠났다. 박씨는 "이웃들이 떠나간 슬픔이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데"라며 "저 혼자 산다고 맨날 챙겨주시고 막걸리도 가끔 한잔 하시고 했는데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권경자(78)씨도 이번 설 명절에 집을 떠나지 않는다. 권씨는 "딸이랑 손녀들이랑 여기로 와서 저녁 먹고 갈 것 같다"며 "집에 오래 있지도 않고 밥만 먹고 갈 것 같다"고 말했다. 가끔 텃밭에서 캔 채소로 소일거리를 한다는 권씨는 "조합에서 하도 집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어느날은 숨이 안쉬어지더니 심장병이 온 적도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권경자씨가 명절에 찾아올 가족들을 위해 연탄을 떼우고 있다. 박인 기자권경자씨가 명절에 찾아올 가족들을 위해 연탄을 떼우고 있다. 박인 기자
    1982년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권씨는 김씨, 박씨와 달리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이다. 그럼에도 조합은 집을 비우지 않으면 이주 비용 대출을 해주지 않겠다며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권씨에게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팔며 생계를 보태는 그는 "조합에서 제시한 가격은 서울에 새로운 집을 사기엔 터무니 없고, 그렇다고 세입자로 들어가자니 나이가 들어 능력이 안된다"며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짜 여길 떠나면 나가서 살 곳이 없다"고 말했다.

    세입자든 집주인이든, 그저 '내 집'에서 살고 싶은 주민들은 모두 집을 비우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들은 무작정 나가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재개발이 진행되더라도 수십 년간 이곳을 지켜온 주민들을 주민으로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사업을 추진하기 전 충분한 협의를 거치고, 세입자와 집주인 모두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다.

    쓰레기 더미와 유리 파편이 가득한 정릉골 골목길의 모습. 박인 기자쓰레기 더미와 유리 파편이 가득한 정릉골 골목길의 모습. 박인 기자
    골목마다 쌓인 쓰레기 더미와 유리 조각으로 뒤덮인 바닥 등 방치된 환경 역시 이들에게는 "빨리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진다. 박씨는 "앞집은 집주인이 가끔 드나들더니 이젠 안오는지 대문 앞에 쓰레기로 가득해 지나가지도 못하게 됐다"며 "그런 것들에 대해 여기 저기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조합 소관'이라는 말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런 것들이 다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인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이미 짐을 싸 두었지만, 유리 조각과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골목조차 삶의 일부가 된 정릉골을 선뜻 떠날 수는 없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대화의 손길과 최소한의 생활 여건을 기다리며, 주민들은 설 연휴에도 쓸쓸히 자신의 '집'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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