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호준 전 한겨레 선임기자. 강경민 사진작가 제공"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해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는 없었어요. 나중에 더 큰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어요. 제가 연구를 통해 붙잡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일 서귀포시 호근동 동네책방 '인터뷰'에서 진행된 허호준 전 한겨레 선임기자의 신작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 북 토크콘서트에서 그가 한 말이다. 3년차 기자일 때인 1992년 4월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해가 발견된 그날의 충격은 그가 한평생 4·3을 연구한 이유가 됐다.
1989년 한겨레에 입사한 그는 지난해 은퇴할 때까지 30년 넘도록 4·3의 진실을 추적해왔다. 취재뿐만 아니라 <4·3, 미국에 묻다>, <4·3, 기나긴 침묵 밖으로> 등의 주요 저서를 남겼다.
이번 책은 다랑쉬굴에서의 오래된 기억에서 시작됐다. 다랑쉬굴 유해가 세상에 공개되며 4·3의 참상을 전국에 알리는 기폭제가 됐지만, 유족의 바람과 다르게 유해는 서둘러 화장돼 바다에 뿌려지며 은폐됐다. 유가족의 분노는 70여 년 전 다랑쉬굴 유해를 수습한 채진규의 목소리로 되살아났다.
허호준 전 기자 북토크콘서트 모습. 강경민 사진작가 제공허 전 기자는 "이번 책은 기본적으로 산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았습니다. 기존 피해자들 증언은 많이 소개됐지만, 무장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 산으로 도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증언과 기록을 중심으로 책 구성을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는 "95%의 팩트와 5%의 픽션"이 가미된 논픽션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허 전 기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한 채진규와 이명복 두 사람이다. "그들의 분노와 좌절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 제주 섬 전체의 역사이자 우리 모두의 내면에 남은 상처"였다고 한다.
채진규는 4·3 광풍이 휘몰아친 1948년 11월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할 당시 같이 산에 오를 것을 강요당한 '납치 입산자'다. 무장대로부터 납치당했데도 '산사람'이라며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다랑쉬굴 학살사건 직후 토벌대에 쫓기면서도 11명의 희생자 얼굴에 흰 천을 덮어주고 나왔다.
허호준 전 기자. 강경민 사진작가 제공
허 전 기자는 "채 선생님 말로는 다랑쉬굴 학살사건 직후에는 굴 안에 연기가 가득차서 못 들어갔다고 하셨어요. 연기를 빼내고 겨우 5m가량 기어서 굴에 들어가 보니 동굴 벽을 손톱으로 긁은 흔적, 고통스럽게 동굴 벽에 박혀 죽은 사람…,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고 합니다"라고 기억했다.
이명복은 경찰의 폭력과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산에 올랐다. "그의 분노는 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억압에 대한 분노이자 정의를 구하는 절규"였다. 꿈에 그리던 세상은 결국 오지 않았고 그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낯선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에게 '산'은 도피처 또는 항쟁의 장소였다. 서로 다른 이유로 산에 올랐으나 운명은 달랐다. 채진규는 평생 고문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았고, 이명복은 섬을 떠난 뒤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다보면 결국엔 4·3은 무엇이고 왜 벌어졌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허 전 기자는 자신의 생각이 담긴 책 구절을 읽었다.
'자기 부모와 조부모가 재산을 강탈당하고,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가 초주검이 되도록 맞고 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제주사람들의 꿈은 그거야. (…) 우리끼리 평화롭게 살 수 있게 건드리지 말라는 게 전부가 아니었을까.'
허호준 전 기자 북토크콘서트. 강경민 사진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