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소방재난본부 일산소방서 전경. 연합뉴스동료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상사로부터 원색적인 욕설을 들은 소방 구급대원이 피해 사실을 알린 직후 공교롭게도 10여개 비위를 저지른 가해자로서 감찰 조사를 받고 있다.
"피해자(구급대원) 역시 평소에 문제가 있었다"는 식의 제보들이 접수됐다는 것인데, 이 중에는 미담사례도 포함돼 있어 소방의 경직된 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 감찰 "피해자는 부적절 행동 없었나요?"…조사 논란
15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북부소방재난본부 일산소방서 소속 구급대원이었던 박민정(가명)씨는 지난해 9월 3일, 훈련을 위해 동료직원 20~30명이 모인 자리에서 같은 팀 상사 A씨로부터 원색적인 욕설을 들었다.
A씨는 박씨에게 "○○○" "○같이 생겨서 일도 ○같이 한다" 등 인격 모독성 발언을 내뱉은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주변 동료들의 만류에도 "저런 ○은 욕을 먹어도 괜찮다"는 말까지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평소 업무 중에도 A씨에게 폭언 피해를 겪었던 박씨는 욕설 피해를 신고했다. 일산소방서 감찰팀은 감찰에 착수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일산소방서 감찰팀은 박씨와 A씨 동료들을 상대로 일종의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질문지에 A씨의 폭언 및 비위행위를 묻는 질문뿐 아니라 박씨의 폭언과 비위행위 여부를 묻는 질문이 함께 포함됐다.
CBS노컷뉴스가 파악한 일산소방서 감찰팀의 질의응답서에는 △A씨의 부적절한 행동을 목격하거나 들은 적 있는지 △박씨의 부적절한 행동을 목격하거나 들은 적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담겨 있다.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 신분에서 시작된 조사였지만, 일산소방서 감찰팀은 박씨에게도 '잘못'이 없는지 확인한 것이다. 당시 설문에 참여했던 동료들은 "질문 내용이 이상하다"고 감찰팀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통상적인 감찰 방식과도 거리가 멀다. 한 소방 관계자는 "감찰을 진행한다면 상식적으로 가해자의 행위에 집중하는 게 맞는다"며 "피해자의 혐의도 물어봤다면 감찰팀이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소방당국은 A씨 사건과 별개로 박씨를 고발하는 제보들이 접수돼 확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해명했다. 소방 관계자는 "폭언 사건이 발생한 지 5일 뒤에 박씨 역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는 내용이 접수돼 감찰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박씨가 비위행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A씨 사건을 종결한 뒤 별도로 조사를 진행했어야 했다는 게 감찰 부서 근무자들의 의견이다.
미담사례도 감찰, 경찰에 고발까지…결과는 불송치
A씨가 경징계 처분을 받으면서 감찰팀의 조사 대상은 박씨로 옮겨 갔다. 감찰팀은 A씨 사건 직후부터 박씨의 근무태만이나 직장내 괴롭힘을 고발하는 제보가 여러 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큰 틀에서는 3가지 범주였지만, 세부적으로 따지면 10여개에 달했다. △근무 중 사무실 정위치 미준수 △지각 △직장내 괴롭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구급활동일지 지연 및 허위 작성 △환자 미이송 유도 △공용물품 사적 사용 등이다.
박씨는 근태 등 일부 내용은 인정하면서도, 나머지 의혹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특히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안에 대해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8월 박씨가 이석증이 있는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뒤, 환자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소방 내부망 '칭찬합시다' 게시판에 자신의 칭찬글을 스스로 작성했다는 내용이다.
감찰팀은 환자가 응급조치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박씨가 환자의 휴대전화를 몰래 이용해 자신의 칭찬글을 스스로 올렸다고 의심했다. 게시글이 올라온 시점과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시각이 맞아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이어 감찰팀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박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수사기관에 협조 요청을 하는 통상적인 방식과 달리, 감찰 담당자가 이례적으로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 고발장을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박씨의 주장은 달랐다.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환자가 박씨에게 대신 글을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실제 환자는 자필로 쓴 확인서를 제출하며 박씨를 옹호했다. 그는 "칭찬합시다 게시판에 작성 도중 어지럽고 헷갈려 (박씨에게) 도와달라고 했다"며 "휴대전화가 잠금 설정이 돼있기 때문에 내 동의 없이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확인서를 작성했다.
사안을 살펴 본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불송치 결정했다. 그제서야 감찰 팀 역시 이 사건을 종결했다.
박민정(가명)씨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되자, 박씨에게 도움을 받은 환자가 자필로 작성한 사실관계 확인서. 독자제공박씨는 "칭찬합시다 게시판에 칭찬글이 올라온다고 해서 승진을 빨리하는 것도 아니고, 한순간에 대원의 평판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며 "그만큼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사경을 헤매는 환자 몰래 글을 썼다는 누명을 쓰고 고발까지 당하다 보니 조직생활에 허망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절차대로 진행한 정상적인 감찰이라고 맞서고 있다. 보복성이나 먼지털이식 감찰이 아니라는 것. 소방 관계자는 "욕설 사건 이후 박씨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내부 제보들이 들어왔다"며 "박씨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감찰팀이 아무런 증거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진행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화난다기보다는 두려워"…공포가 된 일터
박씨는 현재 정신과를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상사의 폭언 사건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가해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으며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다.
수 년 전 발생해 기억도 나지 않는 사안부터 통상적인 근무방식, 근태와 관련된 내용이 조사내용에 포함되자 억울함보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특히 상사의 욕설 사건 전까지는 아무런 의혹제기가 없었지만, 피해를 공론화 한 직후부터 자신의 비위사실을 고발한다는 제보 10여건이 접수되자 박씨에게 일터는 공포로 변했다.
일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병가를 반복해서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박씨의 심리상태는 여전히 불안하다.
박씨는 "업무를 하면서 내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 있고 반성한다"며 "하지만 욕설 사건 이후부터 갑자기 감찰 조사를 시작하고, 나와 관련된 설문조사도 진행했다고 하니 화나기보다는 두렵다"고 말했다.
이어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까지 조사를 받다 보니, 내가 조직생활을 잘못했다는 자책을 하게 되고 심적으로 많이 힘들다"고 덧붙였다.
현재 박씨에 대한 징계 수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박씨가 올해 초 경기 용인소방서로 전보되면서 감찰 사건 역시 경기도소방재난본부가 넘겨받았다.
본부 감찰팀은 제보 내용 중 △근무 중 사무실 정위치 미준수 △환자 미이송 유도 △구급활동일지 지연 및 허위 작성 등 3가지가 인정된다고 판단하고 박씨의 징계 수위를 경징계로 의결했다. 박씨의 소속관서인 용인소방서 결정에 따라 최종 징계 수위가 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