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국무총리가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삼성전자 파업 관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정부가 18일 열릴 삼성전자 노사의 교섭을 앞두고 21년 만의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한껏 높였다.
정부는 비록 '대화와 타협'을 함께 강조하며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지만,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긴급조정권'을 언급한 것 자체만으로도 노정 관계에 적지 않은 파장이 일 전망이다.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 노사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서 사후조정 회의를 재개할 예정이다. 지난 13일 사후조정 회의가 무산된 이후 닷새 만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전날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마친 뒤 대국민담화를 통해 "파업으로 국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정부는 국민 경제 보호를 위해 '긴급조정'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대응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며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말씀드린다. 18일 교섭은 파업을 막을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며 "노사 모두 이 자리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칼자루에 손 얹은 정부…긴급조정권, 칼집에서 나올까
연합뉴스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이 예고된 이후 보수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는 꾸준히 정부를 향해 긴급조정권 발동을 촉구해왔다. 하지만 정부가 공식 석상에서 긴급조정권을 직접 거론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긴급조정권은 노동조합의 쟁의행위가 △공익사업에 관한 것이거나 △규모가 크거나 성질이 특별해 국민경제를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거나 △국민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을 때 발동될 수 있다. 발동 즉시 30일간 파업이 금지되고, 그동안 중노위 조정이 진행된다. 조정이 무산될 경우 사실상 중노위가 강제 중재안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 경제 손실을 막기 위한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하지만, 단지 피해 규모가 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상 노동3권을 정면으로 제한하려 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피해 규모가 크거나 고임금 노동자라는 이유로 정부가 파업권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대기업 노동자는 파업하지 말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주무부처 수장인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그동안 긴급조정권 발동과 거리를 두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지난 13일 김 장관은 유튜브 '장윤선의 취재편의점'에 출연해 관련 질문에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가 절실하다"고 답하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앞서 지난 14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파업이 발생한다면 긴급조정도 불가피하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다만 긴급조정권은 법적으로 중노위원장의 의견을 들은 뒤 노동부 장관이 발동하는 고유 권한인 만큼, 산업부 장관의 발언은 제도적으로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 의견에 가까웠다.
반면 이번 담화에는 노동부 장관이 긴급 회의와 대국민담화 현장에 모두 직접 배석하면서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부가 아직 칼집에서 칼을 뽑지는 않았지만, 칼자루에는 손을 얹고 경고한 셈이다.
이재명 정부 노동정책 첫 '우회전 신호' 되나
동시에 이번 발언은 그동안 '소년공 출신'을 내세우며 전임 윤석열 정부보다 친노동 행보를 강조해온 이재명 정부 노동정책의 첫 '우회전 신호'로 읽힐 수도 있다. 실제 긴급조정권 발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언급 자체만으로 노동계는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긴급조정권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7월 아시아나항공, 같은 해 12월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등에 항공물류 차질 등을 이유로 발동된 뒤 한 번도 행사되지 않았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대규모 물류 대란으로 전 산업에 피해가 확산되거나 국민 생명이 직접 위협받는 특수 업종도 아니다.
삼성전자 같은 대형 제조업 사업장에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사례는 1993년 현대자동차 총파업 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넘어가던 시기, 전경 투입 등 물리력을 동원해 파업을 '분쇄'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 허용됐던 긴급조정권을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꺼내든다면 정치적 부담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소 김유선 이사장은 "삼성전자 노조가 이미 합법적으로 쟁의권을 확보한 상태여서 정부 입장에서는 긴급조정권 외에 동원할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라며 "실제 발동보다는 압박 카드 성격이 강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지난 14일 성명에서 "단지 산업 규모가 크고 국가 경제에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할 수는 없다"며 "이런 논리가 허용되면 자동차·조선·철강·배터리 등 국가전략산업 전반에서 노동자의 합법 파업이 언제든 국가 개입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도 17일 "긴급조정권은 노동기본권을 제한하는 최후의 비상수단으로, 과거에도 극히 예외적으로만 행사되어 왔다"며 "사실상 대기업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선례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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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양대노총이 긴급조정권 논란을 계기로 대정부 전면 투쟁에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 노조 가운데 전국삼성전자노조(전삼노)는 한국노총 산하지만, 과반 노조 지위를 유지하며 이번 파업을 주도하는 초기업노조 등 다른 노조들은 양대노총과 무관한 독립노조다. 이 때문에 양대노총이 삼성전자 사업장 노사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삼성전자 노조는 원·하청 구조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 없이 자사 이익에만 집중해 스스로 '고립 전략'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거액의 성과급 논란까지 겹치면서 정부와 사측이 압박 수위를 높이더라도 다른 노조 조합원들의 폭넓은 연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이사장은 "노조 입장에서는 긴급조정권 발동 반대 입장을 당연히 밝히겠지만, 실제 발동됐을 때 양대노총이 조합원들과 함께 삼성전자 사업장에 가서 이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규탄 이상의 대응 수위를 높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 노조는 신생 노조라 경험과 조직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노조 역할에 대한 사고방식도 기존 노조들과 다소 다르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며 "양대노총 내부에서도 이번 긴급조정권 논란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관건은 중노위 사후조정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느냐에 달려 있다. 앞서 삼성전자 노조는 지난 13일 사후조정 회의가 무산된 뒤 대화 거부 입장을 고수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대국민 사과' 메시지 발표와 노동부 장관의 연이은 중재 끝에 사후조정이 성사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이미 긴급조정권 카드 사용 가능성을 설명하며 노사 양측에 대화를 압박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회의 재개를 앞두고 사측은 교섭대표위원이던 김형로 부사장 교체 요구를 수용했고, 노조 역시 김 부사장의 조정장 배석을 허용하며 한 발씩 물러선 상태다.
노조가 파업 예고일로 제시한 21일까지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다만 노사 모두 이번 교섭을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최소한 파업 강행만은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봉합을 목표로 한다면 극적 타결을 이뤄낼 가능성도 아직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