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뛰어넘어 요즘처럼 대중가요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이 뜨거웠던 적이 있을까?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어온 ''세시봉 열풍''은 해가 바뀌어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열풍''에서 ''광풍''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슈퍼스타 K''와 ''위대한 탄생'', ''나는 가수다'' 등 TV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라는 책을 펴낸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를 지난 18일 홍대 앞에 자리 잡은 도서출판 두리미디어에서 만났다. 청바지와 셔츠에다 재킷을 걸친 그의 수수한 옷차림이 단발머리와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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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수다'' 열풍은 무한경쟁의 세태 반영그는 먼저 ''세시봉 열풍''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로 요약할 수 있는 대중의 인식 변화에 주목했다.
"지금의 주류가요에 대한 대중의 싫증을 반영한 현상입니다. 소위 ''꿀벅지''와 ''초콜릿 복근''을 전시하듯 보여주는 자극적인 시각성과 사람 냄새가 사라져버린 매끈한 사운드를 주 무기로 한 아이돌의 노래에서는 더는 듣는 즐거움을 찾기 어려웠던 겁니다. 한마디로 대중은 이제 탄탄한 가창력이 뒷받침되는 노래를 원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한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세시봉 열풍 이면에는 순수했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바탕에 깔렸다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등장은 살벌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10여 년 전에도 시도된 적이 있다. 하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그때는 ''느낌표''와 ''양심냉장고'', ''우리 문화재 찾기''와 같은 캠페인성 프로그램이 대중에게 더 먹혀들었다.
당시에는 수평적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이 사회분위기에 강하게 투영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나 ''긴장''이라는 포맷이 TV 프로그램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회심리가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사람들이 무한경쟁에 떠밀리면서 좀처럼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밀어내야 하는 세상, 그래서 소수만이 살아남는 세상의 질서가 더욱 견고해졌어요. 예능 프로그램도 이런 세태를 반영해 ''긴장''이라는 포맷을 강화해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좋은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바들바들 떨면서 무대를 내려와야 하나요? 한편으로는 우울한 이야깁니다."
◈ 세시봉 열풍은 ''공동체적 화합''에 대한 열망이에 반해, 세시봉 친구들에게는 공동체적 화합과 상생의 아름다움이 있어 보는 이들에게 행복감을 준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마구 수다를 떨다가 누군가 갑자기 노래를 시작하면 옆의 친구는 기타를 잡고 즉석에서 반주해 준다. 다른 친구도 슬그머니 일어나 더블베이스를 만지고 후렴구에 이르면 화음을 넣어준다.
이런 따뜻하고 자유로운 공동체적 분위기는 40~50대의 세시봉 세대뿐 아니라 20대까지도 세시봉 열풍에 끌어들이는 힘이다.
이와 함께 70년대 포크가 주로 순수하고 힘없고 가난하고 소박하고 어린 존재들에 주목하고 노래했다는 것도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대중에게는 큰 위안이다.
노랫말에 ''하얗다''와 ''맑다'', ''작다'', ''어리다'', ''연약하다''와 관련된 단어나 이미지들이 유난히도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노래는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의 아름다운 것들, 어니언스의 작은 새, 송창식의 고래사냥, 서유석의 타박네야, 이장희의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등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어떤 세대든 나이를 먹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취향에도 일정 정도 변화가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자기 윗세대 노래에 대한 동감과 감동의 폭이 조금씩 넓어진다.
청소년기에 포크의 감수성이 전혀 없던 서태지와 H.O.T. 세대들이 나이가 들어 27~29살쯤 되면 1990년대의 대표적 포크인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 푹 빠지는 것도 하나의 사례다.
"서태지와 H.O.T. 세대들이 당시 가장 좋아했던 말은 ''나는 나다!'' 혹은 ''나는 고유하다!''가 아닐까 싶어요. 그만큼 이들은 타인과 맺는 관계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 서른 즈음이 되면 취업이나 결혼, 혹은 직장 내 이런저런 문제 등으로 세상을 굴욕적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죠. 그러니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로 시작해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하는 그 잔잔한 가사가 가슴을 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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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오!''라고 말 못하는 아픔을 담은 트로트마흔이 가까워지면서 예전엔 유치하다고 고개를 돌렸던 ''트로트''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옅어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트로트는 1930년대 중·후반,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백성으로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대도시의 신세대 청소년들이 선택한 새롭고 세련된 노래였다.
당연히 트로트 속에 담겨 있는 사고방식과 태도도 그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은 강압적인 세상의 질서에 대해 ''아니오!''라고 저항하지 못한 채 스스로 굴복했다.
그리고 그 좌절과 패배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학하는 한편, 자기연민에 휩싸이는 복잡한 감정상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트로트에서 과잉된 눈물과 탄식을 동반하는 독특한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영미 씨는 이런 사회 심리상태가 우리 시대에서도 30대 후반부터 비슷한 형태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나이 30이 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늙은 부모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살아가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옳지 않은 짓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세상에 저항도 못하는 무력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죠. 이런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트로트의 가사를 드디어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40~50대가 아무리 포크 세대라고 해도 오늘 내 입에 밥이 들어간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나그네처럼 불안한 시대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라는 나그네 설움을 듣고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 "포크 세대가 세대 간 소통의 중심에 서야!"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 씨는 이처럼 각 세대가 좋아했던 대중가요에는 그 세대를 흡입할 만한 충분한 시대적 배경과 정서가 녹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트로트 세대인 식민지·전쟁 세대와 포크 세대인 7080 세대, 그리고 이들의 조카 혹은 자식 세대라 할 수 있는 서태지·H.O.T. 세대들이 각기 푹 빠져들었던 대중가요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중가요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는 각 세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살펴보는 훌륭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소통의 중심 역할은 세시봉 세대인 40~50대가 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포크 세대인 40~50대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다는 자부심 때문이죠. 이에 반해, 트로트 세대는 무력했던 세대라고 각아내리고, 서태지·H.O.T. 세대에 대해서도 논리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이며 유약하다고 핀잔을 줍니다. 하지만, 포크 세대 역시 스스로 민주적이고 당당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 자신의 행동은 이율배반적으로 굴욕적이고 독재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이 때문에 포크 세대가 다른 세대를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대중가요를 통해 ''세대 공감''이라는 화두를 잡은 그의 시도는 신선해 보였다.
''단절''과 ''고립'', ''비판''과 ''무시''만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세대 간 불화를 대중가요의 이해를 통해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이는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