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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대학살'' 그리고 일본의 ''잔혹 유전자''

기자수첩

    ''난징 대학살'' 그리고 일본의 ''잔혹 유전자''

    [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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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가와무라 다카시 일본 나고야 시장, 지난 2월 중국 난징시 공산당 간부들이 나고야를 방문해 만났을 때 난징대학살(일본식 명칭은 ''''난징 사건'''')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중국인의 공공의 적이 되어있는 인물이다. 이번에는 중일 두 나라가 자유토론으로 난징 대학살의 진상을 밝혀보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시끌벅적하다. ''''중일전쟁 중인 1937년 난징에서 통상적인 전투행위를 하다 보니 군인도 민간인도 희생되었을 뿐 일방적인 학살은 없었다''''고 본다는 것이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의 주장이다.

    ◇20세기 최악의 사건, 난징 대학살의 실체

    난징(南京)은 송나라, 오나라, 명나라의 수도였던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4곳 중 하나이다. 산둥성(山東省)과 상하이(上海)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난징학살 사건은 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난징으로 진격하면서 저지른 만행으로 난징에 도착하기까지 약 30만 명을 살해했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숫자는 추산이다.

    전쟁 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구호단체 자료에 따르면, 난징에서 버려진 시체를 모아 매장한 것이 15만 5337구(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 포함)로 기록돼 있다. 문제는 양쯔강에 내다버린 시체가 상당한 규모인데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인 마쓰이와 6사단장 하세 히사오 등 여러 명이 재판에서 책임자로 지목돼 사형에 처해졌다. 판결문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해 있던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는 것.

    살해 방식은 저항 못하는 양민을 무차별 사격, 생매장, 가두고 불을 질러 살해하는 방법 등이 동원되었다. 강간과 약탈이 행해졌고 난징 시내의 1/3정도가 불에 타 없어졌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과 중국인 피난민을 보살핀 외국인의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또한 종군위안부를 조직해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로 삼아 괴롭히다 기념촬영 후 모두 살해하기도 했다. ''중국인 목 베기 시합''까지 벌였다고 하니 독일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20세기 최악의 잔혹행위이다.

    ◇일본인은 왜 그리 잔혹한가?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이 쓴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원제, The Rape of Nanking 난징의 강간)가 가장 생생한 난징 대학살의 기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책 출간 후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협박을 받으며 공포 속에서 살았다. 일본 일부 우익파들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로 규정하고 비판에 열을 올렸다.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을 펴내고자 했던 출판사는 결국 강압에 못 이겨 출판계약을 파기했고 ''''난징의 강간''''은 출판되지도 않았는데 ''''난징의 강간'''' 비판서들이 숱하게 등장했다. 아이리스 장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정신과 진료를 받다 이기지 못하고 결국 2004년 36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 ''''난징의 강간'''' 비판운동에 참가한 일본 우익들을 ''''난징사건 부정파''''라고 부르는데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도 이 부류에 속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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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국화와 칼="">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에게 도덕적 규율이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어서 해당되는 영역을 벗어나면 정상을 벗어나 돌변한다"고 분석한다. 천황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목숨을 한순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던 전통, 오랜 기간에 걸친 막부와 지역 군벌 통치 아래서 영주나 오야붕에게 목숨을 맡기고 살던 풍토가 바탕이 돼 일정 영역을 벗어나면 거리낌 없이 생명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 예는 일본인 자기들끼리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된 16, 17세기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전국의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다. 당시 일본 인구는 2천만 정도. 기독교인이 80만 명 쯤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이때 기독교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된 사람이 20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이후 250년 간 일본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를 박해한 방법은 잔혹하고도 절묘하다

    ▲테라우케 - 모든 사람은 절에 등록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절의 증명서를 받고 여행, 혼인, 이사, 취직 때는 절에 가 허가를 받아 제출할 것.

    ▲후미에 - 1년에 1번 이상 예수의 초상화를 땅에 깔고 침을 뱉은 뒤 발로 밟아 기독교인이 아님을 증명할 것. 이를 어기는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고 처형. 처형 방법은 난징 대학살보다 훨씬 잔인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자 최대한 오랫동안 최대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도록 온갖 고문방법을 고안해 냈기 때문.

    ▲5호 감시제 - 5가정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하되 고발없이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5가정 모두 연대책임을 지는 제도. 일본인이 혼내(속마음)을 끝내 숨기고 다테마에(외양)만으로 남을 대한다는 혼내/다테마에 풍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북한의 5호 감시제도는 이를 흉내낸 것.

    ▲기리시단류족 개명제 - 기리시단은 크리스천을 의미. 기독교인이 발각되면 그 친족들도 모두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격리수용되어 마을 전체의 감시를 받는 벌칙. 농사일 외엔 집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단 집에 불이 났거나 사람이 죽어 산에 묻으러 갈 때는 외출이 하가됐다. 일본의 이지메 전통이 여기서 시작됐다.

    우리에게 일제강점의 상처와 독도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중요하듯 중일관계에서도 난징대학살이 가장 중요한 역사청산 과제이다.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징병 피해, 중국의 난징대학살, 일본의 원폭피해….

    불행한 역사 속에서 세 나라 민중이 겪은 아픔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동북아시아의 공존과 번영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 간의 증오를 넘어서지 못한 채 일본의 망언이 계속되고 그렇게 당하면서도 중국마저 대대적인 역사 왜곡에 나서고 있으니 동북아시아의 공존 번영은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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