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불쌍한 미키 파괴하지 않은 이유? 후회와 반성"[EN:터뷰]
※ 스포일러 주의
봉준호 감독의 세계는 '봉준호'라는 말로 설명된다. 그의 작품에는 계급사회의 어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자본주의와 시스템을 비판한다. 또 현실의 부조리함을 벗겨내고,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과 생명을 조명한다. 그러면서도 웃지 못할 순간에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특유의 유머와 언어를 넘나드는 보편성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다.
'미키 17'은 '설국열차'를 올라탄 '옥자'의 확장된 이야기를 보는듯하다. 아파도 일하고, 숨 막혀도 일하고, X 같아도 일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고 프린팅되는 노동자 미키(로버트 패틴슨)와 그런 미키를 고통스러워도, 더러워도 일하고 죽는 게 당연한 '물건'처럼 취급하는 독재자 마셜(마크 러팔로).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미키 17'은 여느 때처럼 독하고 맵기만 할 줄 알았는데, '봉준호'다우면서도 조금은 순한 맛의 SF로 나타났다.
영화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은 미키와 비슷한 심정이라며 "극 중에서 미키가 그런다. 여러 번 죽어도 죽을 때마다 무섭고, 싫고, 피하고 싶고. 감독 입장에서 그렇다. 난 '봉8'이다. 봉6 '옥자', 봉7 '기생충'에 이은 봉8 '미키 17'"이라고 웃었다.
자신의 기억을 저장해 매번 '미키'로 프린팅되지만, 미키 17과 미키 18이 다른 것처럼 봉7과 봉8은 다르다. '미키 17'은 그동안 축적된 봉 감독의 인장을 꾹꾹 눌러 찍었지만, 전작들과는 또 다르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어떻게 소설이 봉준호식 '발냄새'나는 SF로 바뀌었을까
원작 소설 <미키 7>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키 17'은 기본 뼈대는 같지만, 여러 부분에서 봉 감독만의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는 이를 두고 "발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SF"라고 표현했다.
과학적인 사실과 법칙에 무게를 둔 하드 SF인 소설 <미키 7>이 이과적인 SF라면, 영화 '미키 17'은 문과적인 SF다. 봉 감독은 "청개구리 기질인지 모르겠으나, '괴물' '옥자' '설국열차'를 포함해 네 편의 SF를 했는데 항상 SF 같지 않은 SF를 찍은 편"이라며 "이번에도 우주로 날아가고 휴먼 프린팅이란 첨단 기술이 나오지만, 인간은 여전히 지질하고 한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원작의 많은 부분을 바꿨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원작에서 미키는 역사 교사였지만, 영화 속 미키는, 감독의 설명을 빌리자면 "찐따 같고, 착하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청년"이다. 여기에 독재자에게 아내 일파(토니 콜렛)를 만들어줬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이멜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부부처럼, 독재자 혼자가 아닌 마셜과 일파라는 독재자 부부는 묘한 시너지를 낸다.
봉 감독은 "미키의 입장이 되어 체험하는 것 같은 것에 초점을 맞췄다"라며 "우리끼리 발냄새 나는 SF라고 했는데, 주인공이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을 거 같은 느낌에 초점을 맞춰 굴러갔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한 후 봉 감독은 홍보사에서 '발냄새'란 표현은 너무하다고 했다며 "인간적인 SF"라고 표현하며 또 한 번 웃었다.
'봉준호화'된 '미키 17'지만, 그동안 봉준호의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로맨스'다. 관객들에게 나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수도 있지만, 이건 원작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렇기에 이과적 SF를 문과적 SF로, 그것도 발냄새 나는 SF로 바꾸면서도 가져와 그대로 살린 부분이기도 하다. 봉 감독은 나샤(나오미 애키)가 단순히 남자주인공 옆에 있는 애인 역할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미키가 나샤에게 보호받고 있어요. 크리퍼가 영화 서사에서 중요한데, 크리퍼에 대한 인식을 180도 전환해 주는 인물도 나샤죠. 마셜은 크리퍼를 경멸하고, 동시에 미키도 엄청 혐오하고 경멸하는데, 정작 경멸받아야 할 건 마셜이에요. 나샤가 그걸 시원하게 역전시키고, 나아가 독재자와 강력한 대결까지 이어가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미키를 지켜줬기에 미키가 파괴되지 않는 결말에 도달한 거죠. 영국 시사회에서 그 장면에서 박수가 터졌어요. 관객들도 요즘 정치적 스트레스가 심한 거 같더라고요."(웃음)
전 세계 보편적 문제를 건드는 '미키 17'
'미키 17'이 런던 프리미어와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베일을 벗은 후, 가장 많이 나온 반응 중 하나는 '우리 이야기'라는 거였다. 이는 다른 말로 '보편성'을 의미한다. '기생충'이 전 세계적인 관심사인 '계급사회'를 통찰했던 것처럼, '미키 17'에는 노동 문제와 독재 그리고 인간을 질문한다.
봉 감독은 "SF 영화고, 근본적인 인간 드라마다 보니 미키라는 청년이 좀 불쌍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허술한 데가 많은 친구인데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려고 발버둥 치는 이야기"라며 "기본적으로 미키와 나샤 커플을 응원하는 마음이고, 그들이 영화 속에서 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스럽다"라고 했다.
영화에는 악당이 있기 마련이고, '미키 17'에는 마셜과 일파라는 독재자 커플이 나온다. 봉 감독은 이들을 향한 질문도, 반응도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다들 자기 나라가 겪는 정치적 스트레스를 투사하며 자기네 이야기를 했다. 안 좋은 정치 리더의 교집합, 공통된 모습을 많이 보여줬나 보다"라며 "미키는 요즘 힘든 청년 시대 모습이랄까. 나라별로 반응이 어떻게 달랐다고 말할 부분이 없이 다들 비슷하더라"라고 말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는 한 이탈리아 기자가 마셜을 두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초대 두체(지도자)이자 파시즘의 두체로 불리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모델로 한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봉 감독은 "이탈리아 기자처럼 나라마다, 상황마다 투사해 볼 일이 있는 것 같다"라며 "독재는 항상 블랙코미디가 찾아온다. 무섭지만 이상한 게 있다. 그런 이야기를 마셜에 복합적으로 녹여서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시대를 반영한 또 다른 지점 중 하나는 마셜이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에게 임신과 종족 번식에 관해 이야기하자 카이가 자신을 자궁으로 보는 것이냐며 반발하는 부분이다. 여전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여성을 도구화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지난 2016년 당시 행정자치부는 출생률을 높이겠다며 지자체별 가임기 여성 수를 표시한 '전국 가임기 여성 수를 나타낸 출산지도'를 공개한 바 있다. 그러나 여성을 출산 도구로 본다는 사회적 비판과 반발에 결국 철회했다.
봉 감독은 "그 지도를 보고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천연기념물 분포도도 아니고, 그런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하다. 마셜도 그런 관점을 갖고 있고, 연설할 때 번식을 말한다. 사람을 초청해 놓고 면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며 문제적인 발언이 나온 디너 장면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디너 시퀀스에서 인물들의 모든 게 드러난다. 마셜과 일파 부부의 실체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신"이라고 했다.
독재와 폭력, 혐오와 차별 그리고 '미키 17'에는 세대 갈등도 담겼다. '미키 17'을 보면 미키와 나샤, 카이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는 독재에 반하는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 반면 마셜과 일파는 기성세대다. 봉 감독은 의상 역시 의도적으로 젊은 세대와 부모 세대를 나눠 준비했다.
"마셜과 일파의 윗세대도 안 나오고 중간 세대도 거의 안 나와요. 극단적으로 세대를 나눴죠. 유일한 부모 세대로 나오는 마셜과 일파는 최악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죠. 그런 인물들이 장렬하게 퇴장하고 결국 나샤가 연단에 서잖아요. 물론 지크(스티븐 박)와 마마 크리퍼처럼 좋은 세대의 모습도 나오지만, 부모 세대가 훌륭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폭탄 터트리지 말고 곱게 퇴장하는 게 좋고, 곱게 늙어야 해요."(웃음)
17, 18 그리고 반스…미키 17은 결국 파괴되지 않았다
마셜과 일파 같은 나쁜 어른들과 달리 젊은 세대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저항하고 행동한다. 소심한 미키 17은 나샤를 통해 결국 소모품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찾는다. 그런 지점에서 '미키 17'은 타이틀 롤인 미키 17의 성장 드라마인 것이다.
봉 감독은 "미키라는 청년은 착하고 억울한 일은 많지만, 억울해도 실실 웃고 다니는 답답하리만치 착한 아이다. 죽어도 프린터에서 출력만 되면 되는 존재"라며 "미키 17도 그런 상황에 물들다 보니 크리퍼에게 자신의 육질이 좋은데도 왜 안 먹냐고 할 정도로 자존감이 없다. 그런 미키 17이 모든 굴레를 딛고 자존감을 찾는 성장 영화"라고 '미키 17'을 정리했다.
'미키 17'이란 제목 속 '17'도 단순히 미키를 10차례 더 죽여서 17인 것만은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키가 17만이 아니라 18도 존재하는 것 역시 의도된 바다.
봉 감독은 "18은 어른이 되는 숫자다. 이 영화를 미키의 성장 영화로 봤을 때, 미키 18이 뒤로 가면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이고 미키 17을 보호하려고도 한다. 휴먼 프린트도 원형이고, 사이클러도 원형이다. 쳇바퀴처럼 계속 반복되는 굴레를 미키 18이 폭파시키는 것"이라며 "그렇게 17, 18을 넘어 미키 '반스'가 되는 것이다. 제목이 영화에 세 번 나온다. 17, 18, 그리고 반스.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미키 17은 나샤와 미키 18의 도움으로 '반스'라는 성을 되찾고, 자신이 소모품이 아닌 '미키 반스'라는 인간임을 자각하며 영화가 끝난다. 이 결말만 보면 봉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달리 해피엔딩이라 볼 수 있다.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게 된 이유를 묻자 봉 감독은 "나는 그러면 안 되나?"라며 웃었다.
그러나 '미키 17'은 분명하게 봉 감독의 인장이 찍힌 영화다. 관객들에게 쉽게 해피엔딩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는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긴 한데, 바로 앞에 악몽 신이 있다. 그 악몽 신을 공들여서 찍었다. 그 잔상이 오래 남길 바랐다"라며 "미키가 다행히 악몽을 극복하긴 하지만, 그 잔상과 경멸의 말들은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그리고 무언가 또다시 출력된다.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그 잔상이 남길 바랐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어쨌든 이번 영화에서는 미키라는 불쌍하고 측은한,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인 미키가 이런저런 가혹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결국 파괴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약간의 후회와 반성이랄까요. 그동안 제가 찍은 영화에서 제가 만든 캐릭터들에게 가혹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웃음) 한 번쯤은 덜 가혹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미키도 겪는 일이 하도 가혹해서 이런 말이 무책임하게 들리긴 할 텐데, 결말만이라도 파괴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건 나샤 덕분 아닐까요?"(웃음)
2025.03.13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