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과 궁녀들의 처소로 알려진 함화당(자료제공=문화재청)
▲함화당과 집경당-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 북쪽에는 흥복전이라는 제법 크고 넓은 전각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때 헐려 지금은 터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흥복전은 내각 회의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라는 설과 궁중 여인들을 위한 처소였다는 엇갈린 주장이 있다.
교태전에 비해 규모가 적은 것으로 보아 빈궁의 처소일 가능성이 있다. 궁궐의 건물은 때에 따라 기능을 달리 했다고 하니 두 주장이 모두 맞는 것일 수 도 있다.
아뭏튼 흥복전 일대의 건물들은 궁녀와 후궁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궁녀의 수만 5백을 넘게 헤아렸다고 하니, 이들이 사용하는 공간 또한 넓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많은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 함화당과 집경당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돼 그나마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다. 두 건물은 따로 지어졌지만, 복도로 연결돼 있다.
함화당과 함께 후궁과 궁녀들의 처소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집경당. 함화당과 복도로 연결돼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궁녀들의 처녀 감별법 ‘금사미단(金絲未斷)’
조선시대 궁녀의 삶은 어땠을까? 드라마에서 보듯 일평생 임금만 바라보며 궁에서 생을 마치는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까?
궁녀는 왕을 비롯해 왕비등 왕족들을 보필하고 돕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지금 공무원과 같은 신분이었다. 받는 월급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RELNEWS:left}근무형태 또한 침전을 지키는 지밀나인을 제외하고는 보통 8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날 쉬는 격일 근무제였고, 지밀나인들도 12시간을 근무하면 24시간을 쉰 뒤 다음 근무자와 교대했다.
현재의 근로조건 보다 오히려 좋은 환경이다.
그러나 궁녀는 한번 선발되면 평생토록 궐밖을 나가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는 엄격한 규율에 매어 살았다. 선발과정 또한 엄격해서 보통 10살을 전후한 어린 나이에 선발됐고, 처녀성을 감별하는 독특한 선발제도를 통해 궁에 들어왔다.
처녀성을 감별하는 방식은 ‘금사미단(金絲未斷)’이라고 해서 앵무새의 피를 팔목에 떨어뜨려 흘러내지 않으면 처녀로 인정했다고 한다.
▲임금을 기다리는 궁녀들의 염원-수다문(受多門)
궁녀들은 임금에 눈에 들어 밤을 함께 보내면 신분이 달라진다.
평생 처녀로 늙으며 힘든 궁 생활을 하는 것도, 바로 임금의 ‘승은’을 입어 단숨에 왕족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궁녀는 특별상궁으로 승격되고, 아이를 낳게되면 종4품의 후궁이 되며 상궁의 윗전이 된다.
흥복전의 서행각에는 수다문(受多門)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많이 받는다(受多)는 뜻의 ‘수다문’은 임금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궁녀들의 염원을 그대로 담고 있다.
수백을 헤아리는 궁녀중에 왕의 눈에 드는 궁녀는 과연 몇이나 됐을 것이며, 자식을 수태해 후궁까지 오르는 궁녀는 또한 그중에 얼마나 됐을까?
조선시대 궁중의 암투가 잔혹하고 치열했던 배경에는 이렇듯 수많은 여인들의 염원과 질투가 얽혀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