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스크린을 배경으로 액체인 술, 불이 채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 형형색색의 깃털이 느린 화면으로 낙하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깃털보다 무거운 담배꽁초가, 꽁초보다 저항을 덜 받는 술이 더 빠르게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안다. 이 모두는 결국 예외없이 바닥에 닿게 된다는 섭리를 말이다.
프랑스 영화 '까밀 리와인드'의 이러한 오프닝을 보면서 '독 안에 들어가도 팔자 도망은 못 한다'는 속담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운명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이치에 우울해진 탓일까.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이 극 초반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걷던 길을, 엔딩에서는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삶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앞의 속담에 담긴 속뜻도 알게 될 터다.
이렇듯 180도 다른 까밀 리와인드의 오프닝과 엔딩 사이 간격을 훑어가는 여정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만약에 지금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당신이 현재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과거로 되돌아간다면?'이라는 질문에 가슴 뭉클한 답을 내놓는 까닭이다.
때는 2008년 12월31일, 송년 파티를 위해 친구 집으로 향하는 까밀(노에미 르보브스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마흔 살 단역 배우인 그녀의 삶은 술 없이 버틸 수 없을 만큼 엉망이다. 열여섯 나이에 만나 불같은 사랑을 나눴던 남편과는 최근 이혼했고, 이른 나이에 낳은 스물세 살 딸 만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열여섯 살 생일 선물로 받은 소중한 시계의 배터리를 바꾸기 위해 잠시 들른 가게에서 까밀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듣는다. 주인 왈 "당신의 시계를 1초 느리게 맞출게요. 시계들은 우주의 움직임보다 1초씩 빠르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옛 추억을 나누다 술에 취한 까밀,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1초를 남겨둔 채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져 잠에 빠져든다.
다음날 병원에서 눈을 뜬 까밀 앞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타난다. "학생이 무슨 술을 그렇게 먹냐"고 혼내는 엄마 아빠를 보며 가슴 뭉클하던 그녀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1985년 열여섯 살로 되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이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해 처음 만나는 남편을 일부러 멀리하고, 엄마의 죽음을 돌이키기 위한 까밀의 고군분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상이어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미래에서 온 까밀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실지를 알기에 틈 날 때마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친구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묵묵히 들으면서 미소짓는 까밀의 모습은 재밌으면서도 쓸쓸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만들어진 이 영화의 배경이 2008년인 점은 상징적이다. 당시 유럽은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늪에 빠져들면서 이전에 누리던 황금기를 빠르게 뒤로 하고 있었다. 각국 정부가 긴축재정으로 복지예산을 줄이면서 중산층은 무너졌고 사회는 급속하게 양극화됐다.
그렇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현재 까밀의 삶을 어렵게 만든 것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반면 까밀이 되돌아간 1985년은 유럽의 최대 호황기였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를 맞으면서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1980년대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의 경제 성장은 최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는 서유럽은 물론 우리나라처럼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한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경험이다.
최근 시간여행을 하는 타입슬립이나 과거 경제 호황기를 무대로 한 영화·드라마가 성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속 과거로 돌아간 까밀의 모습은 마흔 살 때 그대로다. 젊음은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 표정과 몸짓, 말투 만으로 표현된다. 까밀의 남편과 친구들도 그렇다. 극중 풋풋한 외모의 학생들과 대비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설정은 다분히 현실도피적인 여느 판타지물과 달리, 현실에 발붙인 드라마로 이 영화를 규정짓는다.
1985년을 사는 까밀과 친구들은 기존 권위적인 부모 세대에 대항해 자유를 얻어낸 68혁명의 후예답게 학교 권력에도 당당하게 도전한다. 여성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교사를 앞에 두고 "이건 혁명이에요!"라고 외치며 교실을 박차고 나가는 그녀들이다.
과거로 간 까밀이 찾아간 시계방의 주인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용기"라고.
이를 깨달은 까밀의 삶은 더 이상 암울하지 않다. 그녀가 과거 여행에서 가져온 것은 현실을 잊게 하는 달콤한 추억이 아니라, 지금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의지인 까닭이다.
18일 개봉, 상영 시간 115분,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