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말로 예정된 한수원 본사 조기이전 문제가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최근 한수원 고위 관계자가 경주에 내려와 임시 본사로 사용할 건물 후보지와 임시 사택 현황 등을 살펴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상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사이전을 위한 경주의 현실적인 여건은 만만치 않지만 계획대로 본사를 이전해야 한다는 지역 여론도 높아 경주시와 한수원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한수원 고위관계자 경주 방문 임시사옥 후보지들 점검
한수원 등에 따르면 송재철 한수원 관리본부장은 최근 경주를 방문했다. 올해 말로 예정된 한수원 본사 완전 이전을 앞두고 임시 사옥과 직원들의 사택 확보 현황 등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 본부장은 경주시 관계자들과 함께 시가 추천한 8곳의 임시사옥 건물 후보지를 살펴봤다. 대상 건물은 옛 황실예식장 건물과 탑마트 창고 건물 등이다.
▲ 성과는 미흡
아직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수원은 시가 추천한 건물들이 임시사옥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후보 건물 대부분이 최대 700여 명의 직원들을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일부 건물은 창문하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초 용도가 사무실용으로 설계된 건물이 아니어서 임시사옥으로 쓰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사실상 경주 도심에는 임시사옥을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건물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한수원은 월성원전에 있는 신월성2호기 건설사무소와 가건물 등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임시사옥을 도심권에 마련해 달라는 지역 여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더 큰 문제는 직원들의 주거문제
한수원 관계자는 “시민들이 원하면 임시 사무실은 경주 도심 주변의 공터에 천막을 쳐서라도 마련할 수 있다”며 “본사 경주 조기 이전의 가장 큰 문제는 주거”라고 밝혔다.
가족을 두고 혼자 내려오는 직원이야 큰 어려움이 없지만 가족과 함께 내려오려는 직원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기 이전에 대한 한수원 내부의 반발 등 다양한 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수원 노조는 최근 경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본사를 연말까지 이전할 경우 경주에는 주택이 없는 만큼 직원들의 사택을 울산 등 외부에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열악한 경주지역 주택 현실
지난해 한수원 건설본부가 경주로 이전할 당시 150명의 직원 중 15% 가량이 가족과 함께 경주로 내려왔다. 한수원 노조는 이런 수치와 서울 직원들의 인적 구성 등을 살펴보면 최대 300명까지 가족과 함께 경주에 내려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경주에 전용면적 85제곱미터 이하의 아파트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경주에서 현재 구할 수 있는 아파트는 아무리 끌어 모아도 61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의 주장대로라면 무려 200가구 이상이 거주할 공간이 없어 가족과 함께 내려오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의 유동성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주택 여부가 필요하다. 전국적으로 하루에도 수천에서 수만 명씩 거주를 옮기는 상황에서 경주에 주택 여유가 전혀 없다면 경주로 집을 옮기려는 사람들은 경주에서의 생활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수원 노조는 본사가 조기 이전할 경우 울산과 포항, 멀게는 대구에도 집을 구할 수 있도록 사측이 도움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의 주장은 본사 조기 이전을 최대한 지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만 이들의 요구가 무조건 터무니없다고 치부하기에는 경주의 현실이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 경주지역 본사 조기 이전 여론 높아
최양식 경주시장과 정석호 경주시의회 의장은 이 같은 경주의 현실을 감안해 조기 이전을 재논의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최양식 시장은 지난달 26일 열린 민선5기 3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한수원 직원들이 월성원전에서 가까운 울산에 집을 마련할 경우 본사와 사택이 경주에 마련돼도 주소를 옮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지역 발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이전 시기를 결정해야하는 만큼 올 연말로 예정됐던 한수원 본사의 완전 이전을 늦추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석호 경주시의회 의장도 지난 1일 열린 언론인 간담회에서 "한수원 조기 이전을 재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시의원을 비롯한 반발여론이 만만치 않은 상태다.
특히 본사 조기이전으로 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심권 상인과 부동산 업자들의 반발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의 도심이 갈수록 활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한수원 조기 이전만이 재기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다.
조기이전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한수원 노조가 주장하는 가족 동반 300가구 이전은 본사 이전을 연기하기 위한 과장된 수치고 지역의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하면 이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수원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본사 이전과 관련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적극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며 “한수원 본사는 반드시 계획대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한수원
이에 대해 한수원은 본사가 아직까지 착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본사 위치가 늦게 정해졌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도심권 이전을 주장하는 경주지역 여론과 당초 계획대로 양북면에 지을 것을 요구하는 동경주지역 간의 갈등으로 한동안 경주는 바람 잘 날이 없었고 한수원은 결과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양북면으로 본사 부지가 확정됐지만 경주시가 신사옥 건축허가를 위한 도시계획을 수립하면서 상하수도 개설과 국도 4호선 교차로 확보 등의 문제로 최근에야 경북도에 도시관리계획 심의 결정을 요청하는 등 시의 행정이 늦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사택 부지 선정 문제도 시가 한수원에 다양한 요청을 하면서 미뤄졌고 결국 아직까지 결정되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한수원의 한 관계자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라는 말을 사용했다.
원전비리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고, 사장도 공석이며, 본사 이전과 관련해 한수원 내부는 물론, 경주 지역의 여론도 나쁜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수원의 현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 솔로몬의 지혜는 없나?
한수원과 경주시의 입장을 종합하면 양측 모두 본사 조기 이전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사 이전 재논의에 대한 총대를 메는 것에는 양측 모두 주저하고 있다.
경주시와 시의회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재논의를 강행할 경우 표를 잃을 수 있고, 한수원은 먼저 나설 경우 ‘공기업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식의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양식 시장과 정석호 의장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려했지만 역풍을 맞고 이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것에서 이런 현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양측 모두 본사 이전 재논의에 대한 속마음을 숨긴 채 서로 ‘남 탓’만 하며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시간만 질질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경주로 집을 옮겨야할지 서울에 머물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수원의 젊은 직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