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건 감사원장(좌), 전윤철 전 감사원장(우).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토끼 사냥을 하여 토끼를 잡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재상 범려와 한나라의 맹장 한신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지난 23일 사의를 표명한 제22대 양건 감사원장도 제20대 전윤철 감사원장의 전철을 밟은 것으로 전형적인 '토사구팽'형의 인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양건 감사원장. (황진환 기자)
양건 감사원장은 지난 2011년 3월 전임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돼 2015년 3월까지 1년 7개월의 임기를 남겨두고 있다.
양 감사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꾸준히 교체설이 흘러나왔지만 4대강 사업 감사를 통해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포기를 선언한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감사 결과를 내놓는 등 새 정부의 코드에 맞는 감사를 실시하면서 임기가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양 원장은 특히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로부터 유임 전화를 받았다고 공개"하는가 하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헌법학자로서 헌법에 보장된 임기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양 원장이 '코드 맞추기 감사' 논란을 빚으면서까지 임기를 지키려했지만 청와대의 의중은 이용만 하고 버리는 수순을 선택했다. 양 원장의 사퇴는 취임 보름여만에 청와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첫 작품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양건 원장의 사퇴는 전임 이명박 정부 때의 전윤철 감사원장과 닮은꼴이다. 새 정부의
코드에 맞추는 '코드 감사'를 실시하면서까지 임기(정년)를 채우려 했지만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 당하는 전철을 밟는 것까지 비슷한 모양새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 (자료 사진)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국민의 정부 시절 경제 부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을, 참여정부 들어 19대 감사원장(2003년 11월 10일 ~ 2007년 11월 9일)의 임기를 마치고 2007년 10월 20대 감사원장으로 연임됐다. 제 20대 전윤철 원장의 임기는 2015년 11월까지지만 정년으로(감사원장 70세) 인해 2009년 6월까지 재임이 가능했다.
전윤철 감사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새 정부의 시책에 발맞춰 감사를 진행하면서 이른바 '코드 감사' 논란을 빚었다. 감사원은 이명박 정부 출범직전인 지난 2008년 3월31일 31개 공기업 경영실태 감사를 위한 예비감사만 마친 상태에서 이례적으로 서둘러 10여개 공기업의 경영비리를 발표했다. MB정부가 공기업 이사장들의 퇴진 압력을 행사하는 시점에 감사원이 '측면지원'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 4월에는 '노무현 정부의 혁신도시 사업 경제효과가 3배 이상 부풀려졌다'는 감사원 내부 보고서를 외부로 유출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혁신도시 재검토 기류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사원의 이런 행보를 두고 주변에서는 전 원장이 자리보전을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전임 정권의 주요 현안에 대해 알아서 '코드 감사'를 주도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게 나오기도 했다.
전윤철 원장은 정년까지 감사원장 직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고 이명박 대통령이나 청와대도 헌법에 보장된 감사원장의 임기를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전윤철 감사원장은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3개월만인 2008년 5월 26일 정년을 1년 1개월 앞두고 전격 사퇴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초기 전윤철 감사원장의 임기 보장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이 5월 2일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 정무직들은 재신임을 묻는 것이 정치적 도의라는 것이 일반 원칙" 이라며 전 감사원장의 퇴진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전 원장의 고교 후배인 원세훈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퇴를 종용하기도 했다는 얘기가 당시 청와대와 감사원 주변에서 나돌았다. 그래도 전 원장이 버티자 모 대기업으로부터 금품 제의를 받고 이를 거절했지만 제의 받았다는 사실자체를 신고하지 않았다며 사정기관이 조사에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사퇴를 선택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두 전직 감사원장이 헌법에 보장된 임기(정년)를 채우려 했지만 새로운 정권은 일종의
'이이제이' 전략처럼 전 정권 감사에 이용만 하고 결국 자리에서 쫓겨난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정권교체기마다 감사원장이 중도 사퇴하는 것은 감사원 직무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도입한 헌법정신을 위배한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헌법 제97조에 따라 설치된 감사원은 감사원장의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감사원법 제2조 (지위)에는 "①감사원은 대통령에 소속하되, 직무에 관하여는 독립의 지위를 가진다. ②감사원 소속 공무원의 임면(任免), 조직 및 예산의 편성에 있어서는 감사원의 독립성이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감사원법 제8조 (신분보장)에는 "①감사위원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면직되지 아니한다.
1. 탄핵결정이나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았을 때
2. 장기(長期)의 심신쇠약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때
②제1항제1호의 경우에는 당연히 퇴직되며, 같은 항 제2호의 경우에는 감사위원회의의 의결을 거쳐 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퇴직을 명한다." 규정하고 있어서 당사자의 뜻에 반하여 면직되지 않도록 명시하고 있다.
양건 감사원장이 왜 사퇴했는지를 두고는 설왕설래 다양한 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청와대나 감사원 주변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감사원장으로서 전임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감사를 계속해야 하는데 대한 부담감과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 친이계 인사들이 벼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지치고 힘들어했다는 말들이 나온다.
다른 쪽에서는 청와대와 인사 갈등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얘기도 들린다.
청와대가 지난해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정치쇄신특별위원, 인수위에서 정무분과 인수위원을 맡았던 장훈 중앙대 교수를 지난 6월 임기를 남기고 중도 사퇴한 김인철 전 감사위원 후임으로 제청해 달라는 뜻을 양 원장에게 전했지만, 양 원장은 정치권 출신 인사가 독립기관인 감사원의 감사위원으로 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양건 감사원장의 사퇴 원인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임기가 보장된 헌법기관의 수장이 교체된다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역대 감사원장 중 정부 교체에도 불구하고 임기를 채운 경우는 제18대 이종남 감사원장이 유일하다. 이종남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9월 29일 취임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9월 28일까지 임기를 채웠다.
{RELNEWS:right}그러나 13대와 14대 김영준 감사원장은 연임을 했지만 노태우 정부말기인 92년 8월 13일 취임했지만 1993년 2월 24일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감사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김영삼 정부에서 임명된 16대 이시윤 감사원장은 93년 12월 17일 임기를 시작해 정권이 교체되기 직전인 97년 12월 16일까지 임기를 채웠으며, 19대와 20대 전윤철 감사원장과
22대 양건 감사원장은 정년과 임기를 남겨두고 정권교체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야당에서는 헌법도 무시하는 인사라며 청와대를 비판하고 나섰다.
민주당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헌법상 4년의 임기가 보장되고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된 감사원장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임기를 2년이나 남겨두고 사퇴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짐작컨대 새누리당 내 친이명박계 세력의 압박에 의한 것이거나 김기춘 비서실장 체제 하 박근혜정부의 자기사람 심기 신호탄 중 하나인 듯하다. 어느 경우라도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감사원장의 임기는 헌법에 보장된 것으로 석연치 않은 사의 표명을 납득할 수 없다"며, "대통령직 인수위원이었던 제사람 심기차원에서 이뤄진 일이 아닌지 우려가 되는 만큼 감사원장의 사의표명 과정에 대한 진상이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