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겨울 어느 날,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일본 야마가타현의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란 일곱 살 소녀 오싱(하마다 코코네)에게 아버지는 때가 됐다는 듯 말한다.
"너도 이제 일하러 가야겠다."
그 시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여성들의 삶이 모두 그러했으리라. 오싱은 그렇게 미리 받은 일 년치 급여로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고는 부잣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간다.
가족이라는 믿음직한 테두리를 벗어난 오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다. 오로지 다른 가족의 안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식모로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자기 욕구를 채울 수 없다.
더욱이 사사건건 쥐 잡든 몰아세우는 (아마도 오싱과 비슷한 길을 걸어 왔을) 관리자 탓에 오싱은 일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먹거리와 휴식조차 누리지 못한다.
그러던 중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게 된 오싱은 그 집을 나와 폭설이 내리는 설원 위를 헤매다 쓰러지기에 이른다.
영화 '오싱'은 자그마한 몸을 휘청이며 폭설을 뚫고 걸어가는 주인공 오싱의 모습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일곱 살 소녀에게 닥칠 고난과 역경을 엿볼 수 있도록 돕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 빠르게 근대화하던 일본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난 어린 소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화의 물결에 발빠르게 편승해 큰 재물을 모은 사람들, 그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데 노동력을 쓰는 길이 유일했는지도 모른다.
오싱은 물론, 그녀의 불행에 함께 눈물 흘려 주는 엄마, 할머니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자국의 빈민층을 도시 노동자로 흡수했고, 전쟁을 벌여 식민지를 늘려갔다.
영화 오싱은 당시를 살았던 일곱 살 소녀 오싱을 통해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오롯이 보여 준다.
근대화 과정은 어디나 비슷해 보인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소년 올리버의 삶을 그린 찰스 디킨즈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로 보는 19세기 영국이 그렇고, 제국들의 힘겨루기 탓에 하루 아침에 모국어가 바뀌는 지역을 다룬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 속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다.
근대화 과정에서 약자는 손쉬운 먹잇감이다. 극중 오싱을 비롯한 하층민 여성들이 그렇다. 오싱의 생명을 구하고 글을 가르쳐 주는, 시를 사랑하는 탈영병 슌사쿠도 마찬가지다.
"나의 동생이여, 그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오. 부모가 장검을 건네며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쳤더냐.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죽어가라고 스물네 살까지 그대를 키우셨더냐."
슌사쿠가 들려 주는 요사노 아키코의 시는 식민지 확장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대를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던 슌사쿠 자신의 마음이었을 터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00년대 일본의 풍경은 1960, 7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맞은 우리나라와도 몹시 닮아 있다.
고단한 삶을 이어가지만 "난 엄마 딸로 태어나서 기뻐"라며 자기 삶을 긍정하는 주인공 오싱에게서 산업화의 그늘을 살아낸 우리네 할머니, 엄마의 모습이 겹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