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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의 소치 레터]어젯밤 소치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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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률의 소치 레터]어젯밤 소치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 2014-02-11 14:38
    '비에 젖은 소치' 올림픽 개막 전후부터 화창한 날씨를 보였던 러시아 소치는 한국 선수단의 블랙 먼데이였던 10일 밤(현지 시각)부터 가벼운 비가 내려 길을 적셨다.(소치=임종률 기자)

     

    늦은 마감을 마치고 일어나 보니 소치는 젖어 있더군요. 저녁 무렵부터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해 옷에 맞는 걸 신경쓰지 않을 만큼이더니 일어나 보니 밤 사이 기어이 길은 적셨나 봅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물기가 촉촉한 소치 시내를 바라보니 어젯밤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4년 동안의 노력을 확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땀의 결실을 받아들지 못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쇼트트랙 남자 1500m 경기가 끝나고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으로 향하던 중 얼굴에 스치듯이 내린 몇 방울. 상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실수에 믿을 수 없는 듯 온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취재진이 모인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힘없이 빠져나가던 신다운(21, 서울시청)의 마음 깊숙한 곳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지.

    신다운은 경기 후 충격의 여파로 아무 말도 없이 그러나 다소 느리게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소치=임종률 기자)

     

    경기 전 훈련장에서 만난 윤재명 쇼트트랙 남자팀 코치의 말이 떠오릅니다. "신다운이 올 시즌 월드컵에서 넘어지고 실수가 많았을 때 사실 혼도 엄청 많이 냈습니다. 그때 본인도 안타까웠을 겁니다. 발목 인대 부상으로 한달 깁스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올림픽은 평생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거든요. 그래도 꾹 참고 전지훈련을 거치면서 컨디션을 많이 끌어올렸고 컨디션도 좋습니다."

    그랬던 신다운이었습니다. 준결승에서도 1위를 달리며 쾌조의 레이스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너를 돌 때의 그 순간. 성치 않은 왼발이 문제가 됐던 걸까요.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2위를 달리던 선배 이한빈(26, 성남시청)까지 부딪히며 함께 쓰러졌습니다. 어드밴스 규정으로 이한빈은 결승에는 올랐지만 출발 위치가 뒤진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6위에 머물렀습니다.

    불의의 상황에 대한 충격과 4년 간의 땀이 물거품이 된 실망, 그리고 선배에 대한 미안함. 신다운의 침묵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성격이 여려 정신적으로 무너질까 격려해줬다"는 선배 이한빈의 말도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맏형 이규혁의 큰 메시지

    쓰린 마음을 안고 향했던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도 쇼트트랙 못지 않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단거리 간판 모태범(26, 대한항공)이 500m에서 아쉽게 4위에 머문 겁니다. 밴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종목인 데다 네덜란드 전훈과 소치에서 몸 상태가 좋았던 터라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모태범 역시 취재진과 인터뷰를 사양했습니다.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성큼성큼 믹스트존을 걸어나갔습니다. 대신 케빈 크로켓 코치는 "모태범이 상심이 적잖은 것 같다"면서 "컨디션이 좋았는데 네덜란드의 상승세에 부담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지만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한 빙속 강국 네덜란드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지난 8일 남자 5000m에서 역시 메달이 무산된 모태범의 친구 이승훈(26, 대한항공)은 "마치 철옹성 같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맏형의 위엄' 이규혁은 남자 500m에서 노장 투혼을 발휘했지만 18위로 경기를 마감했다. 그러나 모태범에게 "4위도 잘한 것"이라면서 맏형다운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사진은 경기 후 외신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모습.(소치=임종률 기자)

     

    하지만 스피드스케이팅 맏형의 의미 있는 레이스는 묵직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이날 마지막 올림픽에서 투혼을 발휘한 이규혁은 18위에 머물렀지만 표정이 밝았습니다. 눈물을 쏟아냈던 4년 전 밴쿠버 대회 때와는 달랐습니다. 본인도 "1위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만으로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세계적 선수들과 겨룰 무대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순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병가의 상사. 이규혁은 "0.00초대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것이 스피드스케이팅"이라면서 "한때 우리도 네덜란드 선수들을 데리고 놀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더 잘 했고, 모태범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뿐"이라고 의연함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모태범에게 던진 위로의 말. "4등도 정말 잘한 것 아니에요? 빙속이 인기스포츠인 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이렇게 어렵게 경쟁하는데 제가 태범이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희비가 교차했던 10일 밤 소치올림픽의 경기들. 과연 이날의 아쉬움이 남은 경기들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지. 또 밤 사이 촉촉하게 소치를 적신 비가 선수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치유하는 의미로 기억될 수 있을지..... 어젯밤 소치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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