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서 재심 무죄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지난 91년 김기설씨 투신자살 사건에서 검찰이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를 유서 대필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기소해 법원이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던 사건이다. (송은석 기자)
서울고등법원이 오늘(13일) 동료의 자살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한 혐의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강씨는 1992년 7월 확정 판결이 내려진 뒤 22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됐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1991년 5월 재야단체 회원이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투신자살하자 검찰이 김씨의 동료였던 강씨를 자살 방조와 배후로 지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거센 저항에 위기를 느낀 권력은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고 이 사건으로 국민적 저항을 이끌었던 재야단체를 불순한 집단으로 몰고 가려 했다.
이같은 권력의 요구에 따라 검찰은 최고 베테랑 수사팀을 구성해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을 터뜨렸다.
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된 것은 숨진 김기설씨의 유서와 강기훈씨의 필적이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 뿐이었다..
국과수에서 감정을 담당했던 문서분석실장은 이후 다른 사건에서 뇌물을 받고 감정을 해준 혐의가 드러났다.
그러나 검찰은 뇌물을 받은 국과수 실장에 대해 뇌물을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아니었다는 웃지못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유서대필 사건의 유일한 증거였던 필적감정결과가 증거로서 능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결국 검찰과 국과수가 한 사람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기 위한 역할을 나눠 맡았던 셈이다.
강씨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는 어떻게든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정권차원의 다양한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권력이 3권 분립의 원칙을 훼손하고 법원이 법의 정의를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채 권력에 휘둘렸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재판부는 강씨측에 유리한 증거와 증언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검찰측 증거만을 채택하는 불공정한 재판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력은 국면을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팀은 승승장구해 일부는 대법관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 사건 당시 법무장관은 김기춘 현 청와대 비서실장이기도 하다.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법원의 이번 판결은 뒤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법원의 무죄판결만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우선 젊은 시절 친구까지 자살하게 한 파렴치범으로 몰려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진 강씨 개인에 대한 명예회복과 국가 차원의 보상이 필요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제2의 강기훈, 제2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반성과 재발방지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