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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 드레스덴 VS '폭격 피한' 서울과 교토

문화 일반

    '불바다' 드레스덴 VS '폭격 피한' 서울과 교토

    [임기상의 역사산책 ③]"드레스덴을 지도에서 지워라"

    드레스덴 시가지에 소이탄을 퍼붓는 연합군 폭격기들.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하는 드레스덴…"그 곳은 지옥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3일 밤.

    총 234대로 구성된 영국 랭카스터 폭격기들이 바로크풍의 오래된 도시 드레스덴으로 날아왔다.

    이들은 군사시설이건 공장이건 주택가건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했다.

    폭탄의 70%는 소이탄이었다.

    소이탄은 사람이나 건물을 태우기 위해 휘발유와 황 등을 집어넣어 제조한 살상무기이다.

    3시간 후 다시 538대의 영국 폭격기들이 날라와 불타고 있는 도시 주변부를 폭격했다.

    다시 10시간 후, 이번에는 미국의 B-17 폭격기 311대가 도시의 하늘을 뒤덮고 3차 폭격을 실시했다.

    이 3번의 공습으로 18세기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최소한 3만 8천명(연합군 공식 발표)의 시민들이 불과 고열 속에서 녹아버렸다.

    왜 이런 참사가 발생했나?

    당시 미군과 영국군은 순조롭게 독일국경을 넘어 베를린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저항은 미미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맡고 있는 동부전선은 상황이 달랐다.

    소련의 무자비한 보복을 두려워한 독일군이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소련군의 느린 진격에 격분한 스탈린은 독일군의 압력을 분산시켜 달라고 연합군에게 요청했다.

    처칠은 고심 끝에 독일의 전쟁의지를 꺽기 위해 대도시 하나를 골라 지도상에서 지우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도시가 작센 왕국의 수도이자 '엘베의 피렌체'로 불리던 아름다운 고도(古都) 드레스덴이었다.

    교토에 있는 뵤도인(平等院). 지붕에 2마리의 봉황이 있다. 물에 건물이 비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사진=김영태 기자/자료사진)

     

    ◈ 미국의 전쟁부 장관이 보호한 일본의 교토-나라

    1944년 여름에 사이판과 괌, 티니언 등 마리아나 제도를 정복한 미군은 드디어 일본 본토를 폭격 사정권에 넣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B-29 폭격기의 소이탄 투하는 일본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절정은 드레스덴이 폐허가 된 뒤 한달 후인 1945년 3월 9일의 도쿄 공습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도쿄시민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어 11일 나고야,13일 오사카, 16일 고베,19일 나고야 2차 공습. 10일간 공습이 계속되면서 일본의 대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6월부터는 소규모 중소도시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대도시 50여 곳이 쑥밭이 됐지만, 5개 도시는 예외였다.

    바로 교토와 히로시마,니가타,고쿠라,나가사끼였다.

    교토를 제외한 4곳은 원자폭탄 투하를 위해 남겨둔 도시였다.

    그러면 왜 교토는 폭격대상에서 제외됐을까?

    그건 바로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스팀슨 장관은 젊은 날 신혼여행 때 방문한 교토의 아름다움과 찬란한 문화재를 잊을 수 없었다.

    스팀슨 장관의 주장에 따라 교토는 B-29 폭격대상은 물론 원자폭탄 투하 후보지에서 빠질 수 있었다.

    교토가 간직하고 있는 1천년이 넘은 목조사찰 등 각종 문화재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 앞 세종로 일대 (문화재청 제공)

     

    ◈ 조선의 문화재를 지킨 주일공사와 미 육군 중위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1950년 9월 초.

    김용주 주일공사는 인민군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미 공군이 서울을 대대적으로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면 조선을 상징하는 그 소중한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종묘와 사직단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

    도쿄에 있는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간 김 공사는 맥아더 장군와 참모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먼저 김 공사가 입을 열었다.

    "장군님,이번 작전에서 서울에 대한 폭격을 피할 수 없습니까?"

    "그건 공사의 인식부족입니다. 원래 도시란 파괴된 뒤에 새로운 도시로 재건하는 겁니다"

    "서울에는 다른 특수사정이 있습니다. 오랜 전통문화를 가진 서울의 찬란한 문화재와 고적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김 공사는 지도를 펼치고 덕수궁과 창덕궁, 숭례문을 표시해가며 4대문 안 도심을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을 폭격할 때 을지로를 경계로 그 북쪽은 폭격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서울수복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미 육군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인민군이 주둔해 있는 덕수궁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해밀턴 중위는 그 명령을 어기고 인민군이 모두 빠져나와 을지로를 지날 때 공격을 개시해 덕수궁을 점령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한 나라의 궁궐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드레스덴이란 도시는 사라지고, 같은 시기에 먼 동쪽에 있는 교토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RELNEWS:right}

    또 교회 한 곳만 남긴 채 폐허로 변해버린 평양과 달리 아직까지 조선 500년의 숨결을 안고 있는 광화문 일대는 어떻게 보존된 것인가?

    그건 전쟁의 승패를 떠나 인류의 영원한 보물로 남게 될 문화재를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소중한 사랑 때문이다.

    최근 유행하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내놓기보다 먼저 참혹한 전쟁을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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