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자료사진
49일 노역으로 매일 5억원씩 254억원의 벌금을 몸으로 때우고 있는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사건을 놓고 온 국민의 공분이 확산되고 있다.
공휴일을 빼면 노역일이 33일에 불과해 실제 일당은 7억원이 넘는 셈이다. 하루 먹고 살기도 벅찬 서민의 입장에서는 정말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오죽하면 대한변호사협회까지 나서 평등원칙에 어긋나는 양형에 통탄한다는 비난 성명을 냈겠는가?
허 전 회장에 대한 이 같은 판결은 오랫동안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근무해온 이른바 향판에 의해 이뤄졌다. 대주그룹 역시 광주에 뿌리를 둔 업체이다. 봐주기 특혜 판결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는 배경이다.
허 전 회장을 기소한 검찰 역시 1심에서 유례없는 벌금선고유예를 구형해 검찰과 법원이 허 전 회장을 짬짜미로 봐줬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 한건의 판결로 사법정의는 사라지고 사법당국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향판은 수십 년 이어져 온 법원의 인사 관행인데, 서울과 지방을 오가지 않고 본인이 희망하는 한 지역에서만 근무하는 판사이다.
지역 사정을 잘 아는 만큼 충실한 판결을 내릴 수 있고, 판사가 바뀌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 인사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재판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부작용으로 작용한 사례도 많다. 1,000억원대 교비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된 서남대 설립자와 총장이 석연찮게 보석으로 풀려난 사건이나 ‘친형 감사 선임’ 파문을 일으킨 광주지법 선재성 수석 부장판사 사건 등에서 이미 현행 향판의 문제점이 부각된 바 있다.
실제로 재력가들이 주로 신청하는 보석 허가 비율을 보면 향판이 있는 지역의 법원이 다른 곳보다 평균 10%포인트 높다는 통계가 있고, 향판 출신 변호사들이 맡은 형사 사건 2심재판에서 1심 형량을 깎아주는 비율도 일반 사건의 2.5배나 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지역에만 머물다보니 전관예우도 더 심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더 이상 향판 제도를 긍정적 요인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다.
대법원은 이번 황제노역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노역 일당 뿐 아니라 3년으로 돼 있는 현행 노역 유치 기간의 적정성까지 포함해 폭넓은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으로 보기 어렵다. 한 곳에 오래 근무하면 자연히 지역의 토호나 재력가, 변호사들과 유착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또 학연과 지연, 혈연에 얽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폐단은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진다.
미봉에 그칠 것이 아니라 현행 향판 제도를 원천적으로 재검토하고 대수술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