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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소련의 붉은 깃발이 날리다

문화 일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소련의 붉은 깃발이 날리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④] 베를린 최후의 날…약탈과 강간이 난무했다

    ◈ 스탈린 "먼저 밀고 들어가는 부대가 베를린을 차지해라"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군이 적기를 걸고 행군하고 있다. (자료사진)

     

    어느 순간 밤낮으로 폭탄을 퍼붓던 연합군 폭격기의 공습이 중단됐다.

    대신 폴란드 방향 동쪽에서 포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일제히 탄식을 했다.

    "소련군이 가까이 왔다"

    이에 앞서 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휘하 부대에 두고 두고 유럽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우리 연합군은 베를린 정복을 포기하고 그 서쪽 엘베강 앞에서 진군을 중단한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 가치없는 도시를 정복하려는 공방전에 부하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수도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베를린은 소련군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내던져졌다.

    한편, 모스크바에서 열린 베를린 점령을 위한 작전회의에서 스탈린은 장군들에게 베를린 동쪽 40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로를 정한 뒤 지시했다.

    "누구든지 먼저 밀고 들어가는 장군이 베를린을 차지하도록 합시다"

    베를린을 앞에 두고 동과 북, 남쪽 3방면에서 대포 1만 2,700문과 로켓발사대 2만 1,000대, 전차 1,500대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46만 4,000명이 대기했다.

    여기에 맞서는 베를린 수비대는 패잔병과 제대군인, 어린 히틀러 유겐트 등 잡다한 병력 11만명을 겨우 긁어 모았다.

    먼저 대포가 무시무시한 소음을 내며 베를린 시가지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이때 쏟아부운 포탄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발사한 분량을 넘어섰다.

    이어 탱크를 앞세운 보병부대가 건물 하나하나를 정복하면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나갔다.

    베를린 시내는 온통 폭탄 터지는 소리와 기총소사에다 티에르가르덴 공원의 동물원에서 도망쳐 나온 동물들의 울음소리까지 가세하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드디어 베를린 포위와 시가전 8일만인 1945년 5월 2일 오후 3시에 소련군 대포가 포격을 중단했다.

    시내에는 거대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소련과의 베를린공방전 직후 폐허가 된 베를린 시가지 (자료사진)

     

    ◈ 소련군의 환호성…이어진 약탈과 집단강간

    전투가 끝나자 소련군은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꺼냈다.

    배를 채운 뒤 병사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약탈에 나섰다.

    이들은 주택가 가가호호를 뒤지면서 시계를 비롯한 값비싼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았다.
    (이같은 행동은 몇달 후 북한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는 독일여성 사냥에 나섰다.

    독일이 4년간 소련 영토에서 벌였던 온갖 패악질을 소련군은 잊지 않았다.

    소련의 어느 저명시인은 전선에 보내는 신문에 글을 썼다.

    "독일 여자들을 강간하라~"

    병사들은 떼를 지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택에 침입해 무차별적인 윤간을 저질렀다.

    모든 여자들은 눈에 띠기만 하면 한번에 그치지 않고 수십 차례 강간을 당했다.

    저항하면 구타를 하거나 총검을 휘둘렀다.

    수도원의 수녀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통일을 주도한 헬무트 콜 총리의 부인도 피난열차를 놓친 후 어머니와 함께 겁탈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조사를 벌인 결과, 베를린에서만 대략 10만명이, 유럽 전역에서 독일여성 200만명이 강간 피해를 당한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50년 후 베를린을 찾은 소설가 공지영씨가 친한 독일 할머니에게 물었다.

    "전쟁을 어떻게 겪었나요?"

    "이상해요~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잊어먹은 게 아니라 그 참혹한 경험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고, 죽는 날까지 완벽하게 '침묵'을 지킨 것이다.

    서베를린에서 운집한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케네디 대통령 (자료사진)

     

    ◈ 존 F 케네디 대통령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독일국민들은 특유의 근면과 기술을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다.

    동독 한 가운데 외로운 섬같이 고립돼 있는 베를린도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소련의 전차부대와 미사일에 둘러싸인 시민들은 언제 소련군에 점령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를 달래기 위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6월 26일 슈네베르크 시청 앞에 마련된 연단에서 '베를린에서의 어느 하루'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 말미에 강조했다.

    "모든 자유인은 그 어디에 있든 베를린 시민이다.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연설이 끝나자 루돌프 빌데 광장에 모인 서베를린 시민 45만명은 열광했다.

    그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당시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연단 뒤에 있던 우리들은 히틀러가 다시 살아온 줄 알았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통일에 대한 열망과 용기가 샘솟고 있다는 걸 깊이 느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2000년 3월 9일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통일을 위한 협력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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