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her)'의 포스터 속 남자는 무언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눈치다. 다문 입술에는 그 깨달음을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의지가, 깊은 눈에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듯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남자가 입은 붉은 셔츠와, 같은 색 배경에서 그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튤립의 꽃말이 '사랑 고백'이고, 프랑스 국기에서 붉은색의 상징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박애'라는 점이 그 증거다.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영화 그녀는 한 남자의 특별해 보이지만 결코 특별할 것 없는 사랑 경험을 통해 20세기부터 이어 온, 사랑을 물건처럼 소유로 여기게 만든 순결 이데올로기의 편협한 민낯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떠나보내는 거야" "너를 사랑하는 만큼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라는 다소 모순적이면서도 끝없이 확장해가는 사랑의 속성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포스터 속 남자의 이름은 가까운 미래에 사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로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이라는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 주는 대필작가다.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 별거 중인 그는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를 만나게 된다.
자기를 깊이 이해해 주고 무슨 말을 해도 귀기울이는 사만다 덕에 조금씩 활력을 되찾아가던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느끼는 자기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게 사랑일까?'
영화 그녀는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사랑이 싹트고 무르익고 시드는 과정을 몹시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극 중간 중간 삽입된, 테오도르가 아내와 행복했던 한때를 떠올리는 회상신들은 그래서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삶에 활력을 불어넣던 사랑은 이제 한낱 추억으로 남아 공허한 테오도르의 삶을 짓누르는 짐으로 남았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의 사랑 가득한 마음을 편지로 전해 주는 일을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대필을 의뢰하는 고객들과 마찬가지로 테오도르 역시 자신의 사랑을 가꿔가는 데는 서툴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랑이라는 보편타당한 감정이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에 온전히 뿌리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그녀'의 한 장면
테오도르가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져 활력을 되찾아가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하는 모습은 우리 시대의 사랑이 인간 남녀의 그것으로만 국한돼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계급, 인종, 성에 따라 "이건 사랑이고 저건 사랑이 아니다"라고 구분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랑을 억압하려는 우리 시대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의 자화상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러한 편견들을 이겨낸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특별한 힘을 지닌다. 인공지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각의 범위를 끝없이 넓혀가던 사만다가 도달한 사랑의 궁극은 박애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사랑의 감정마저 물질로서 소유하는 것이라고 배워 온 현대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듯하다.
극 말미 인류의 자각능력을 넘어선 사만다의 선택과 이에 대처하는 테오도르의 자세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당신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게 행복해" "우린 모두 우주라는 한 이불을 덮고 있잖아" 등의 극중 대사가 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