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산에서 북베트남 군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 해병대
◈ 북베트남의 양동작전…'케산 전투' 막이 오르다
1968년 1월 북베트남 군대가 남쪽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통로인 호치민 루트에 뿌려놓은 음성감지기에서 색다른 신호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체 산악지역에서 코브라뱀이 공격을 준비하듯 '쉿~쉿' 하는 이상한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베트남으로 이동하는 소리였다.
남베트남의 서북쪽에 있는 케산의 미 해병대 기지.
해발 1,477m 높이에 길이 1마일, 폭 1/4마일의 평평한 고원지대에 자리잡았다.
한국의 대통령 관저가 북한이 보낸 특수부대 31명의 습격을 받은 바로 그 1월 21일 새벽.
77일간 격전이 벌어진 케산의 위치. 지형상 프랑스군이 참패했던 디엔비엔푸와 비슷하다. (사진=국방부 제공)
북베트남군의 장거리포들이 정확한 조준으로 포격을 시작했다.
첫날 하루에만 미 해병대 18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다쳤다.
해병대원 제임스 헤브론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이 퍼부어대는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첫날 하루에만 300발이 떨어졌다. 77일간 지속됐던 포위는 그저 죽음과 파괴의 연속이었다"
미국 언론에는 3,500명의 미국 해병대와 2,100명의 남베트남 특수부대원이 철조망 속에 갇혀 있는 우울한 모습의 대형 사진이 연일 게재됐다.
이들 병사들은 곧 자기들보다 몇 배나 많은 적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군도 100여 문의 크고 작은 대포로 포탄을 퍼부었지만, 적의 대포는 14년전 디엔비엔푸 포위 때처럼 높은 산 동굴 속에 은폐돼 있어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같은 시각에 케산과 라오스 국경의 중간에 있는 랑베이의 미군 특수부대 기지에 탱크를 앞세운 북베트남 병사들이 몰려 들어왔다.
랑베이에 있던 1,000여 명 가운데 900여 명이 몰살을 당하고 60명만 헬리콥터로 구출되었다.
케산에서 포위되어 악전고투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북베트남 보병들은 쉬지 않고 접근해왔다.
고지의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B-52 폭격기 편대가 출동해 사상 최대의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케산 고지 주변의 적 기지에 하루에만 5,000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케산전투에서 6만 톤의 폭탄을 투하한 B-52 폭격기
케산 주변 2마일 내의 마을들은 완전히 평지나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케산 전투는 양동작전의 일환이었다.
북베트남이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 북베트남군과 게릴라들, 미국 대사관과 대통령궁, 공항, 군사령부를 공격하다구정(설날)을 앞두고 베트남 전역은 고향을 찾아가는 귀향행렬로 큰 혼잡을 빚고 있었다.
버스는 명절을 맞아 들떠 있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을 가득 싣고 있어 일일이 검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남베트남 게릴라) 8만 5,000명이 사이공과 후에 등 41개 중소 도시에 잠입했다.
무기와 탄약은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미는 농산물 수레 속이나 가짜 관속에 넣는 방법으로 운반했다.
1968년 1월 31일 새벽 2시 30분.
19명의 베트콩이 사이공의 미 대사관 정문을 택시로 박차고 들어가거나 담을 폭파시킨 후 총을 난사하며 뛰어들어갔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담벽을 사이에 두고 베트콩과 교전중인 미군들.
베트콩 '자살특공대'는 6시간 동안 해병대 경비병들과 교전을 벌이다 전원 전사했다.
미군도 7명이나 죽었다.
미 대사관 공격을 신호탄으로 베트콩 특공대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 남베트남 정규군 사령부, 대통령궁을 차례로 급습했다.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인 옛 도시 후에(한국으로 치면 '경주')에서는 위장하고 잠입한 5,000명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도시를 점령했다.
남베트남의 중소도시 13개가 베트콩에게 함락되었다.
폐허가 된 옛 도시 '후에'. 귀중한 문화재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사이공에서는 5개 대대가 시가전에 투입되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 폭격기들은 인구가 밀집된 게릴라 점령지역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수만 명이 죽고 다치거나 집을 잃어버렸다.
벤트레를 완전 평정한 후 한 미군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후에를 제외하고는 구정 공세는 10일쯤 지나서 막을 내렸다.
후에를 둘러싸고 한달간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미군에게 152mm 곡사포를 발사하는 북베트남 병사들.
미군은 적의 전사자가 3만 7,000여 명이라고 발표했다.
미군 전사자는 2,5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기습공격은 백악관은 물론 미국 국민들에게 깊은 충격과 회의를 안겨줬다.
2월 9일자 <타임>은 이렇게 보도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감쪽같이 사라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적군이 홀연히 나타나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에서 동시 다발적인 공격을 가했다"
◈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들…드디어 반전시위가 시작되다
미국의 보통 시민들의 정서와 의견을 대변해온 CBS-TV의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
남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전투장면은 특파원들의 보도를 통해 생생하게 미국 국민들에게 방영되고 있었다.
CBS 텔레비전의 스튜디오에서는 아버지 같은 인자한 인상의 존경받는 뉴스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50만 명이 넘는 미군과 한국, 태국, 호주, 뉴질랜드군, 그리고 남베트남 정규군 등 100만 명이 넘는 병사가 깔려 있었다.
미국은 국가재정이 거덜날 정도로 엄청난 국가예산을 남베트남에 쏟아붇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만 명의 북베트남 병사들이 이동하는 낌새도 포착하지 못하고 기습을 당한 것이다.
한편, 베트남전이 장기화되면서 젊은 미군 병사들의 주검이 계속 본국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미국 국민들은 이 부도덕한 전쟁의 실체를 깨닫고 대학가를 시작으로 반전운동에 나섰다.
1969년 미국 버클리대 교정에서 열린 반전시위
25만 명의 젊은이들이 징병을 거부했다.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미국 사회의 분열과 반목이 시작됐다.
결국 존슨 대통령이 굴복했다.
그는 베트남 주둔 미군을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은 제한하며, 평화협상을 모색한다고 발표했다.
평화협상은 1968년 5월 12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북베트남이 수많은 인명을 바친 케산 전투와 구정 공세가 결국 결실을 맺은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오랜 기간 연구한 군사분석가 브라이언 젱킨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 아니라, 긴 세월동안 타협이 불가능했던 베트남 민족주의와 싸웠다"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