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노컷뉴스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책/학술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임기상의 역사산책 83]차일혁 경무관, 빨치산 총수 이현상 장례를 치르다

    ◈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에 뿌려진 이현상의 시신

    충남 아산시에 있는 경찰교육원에 새겨진 차일혁 총경의 동판. (사진=경찰청 공식 블로그 제공)

     

    군경에 의해 사살된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시신이 갈 곳이 없었다.

    직계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있고, 유일한 혈육인 숙부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현상 사살의 주역인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 차일혁 총경에게 5연대장인 정인주 총경이 권유했다.

    "차 총경~ 비록 공비의 괴수로 국가를 혼란하게 했지만 그래도 한판 승부를 겨루었던 상대 아닙니까?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적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소?"

    "맞습니다. 비록 공비의 괴수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줍시다"

    1953년 10월 8일, 차일혁은 2연대 본부 옆에 있는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했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 위에 유품인 염주를 올려놓았다.

    차일혁은 칠불암이 불에 탄 후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게 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스님의 독경소리와 함께 하얀 재로 변해갔다.

    이따금 불어오는 강바람을 타고 하얀 재가 날렸다.

    지리산에 스며 들어간 후 5년이 지나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은 이제 한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가에 흩날리고 있었다.

    차일혁은 철모를 벗고 타다 남은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았다.

    그리고는 M1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섬진강변에서 상념에 젖은 차일혁.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다 뿌린 후 권총을 꺼내 허공을 향해 3발을 쏘았다.

    "탕~탕~탕~"

    이현상이 마지막 가는 길에 보내는 조사이다.

    지리산에서 숨져간 수많은 원혼들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삶을 끝낸 이현상에게 보내는 조사였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수첩에 적혀 있던 한시를 떠올렸다.

    "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떼 흩어지니
    남쪽으로 천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내 마음에서 조국을 잊어본 적 있었을까?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 속엔 끓는 피 있네"

    차일혁이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이현상의 시체를 화장한 일이 알려지자, 일부 경찰 간부들이 시비를 걸었다.

    "차 총경~ 빨갱이 시체를 화장해줬다면서? 그것도 중을 불러 염불까지 하게 하고"

    화가 치민 차일혁은 큰 소리로 항의했다.

    "죽은 뒤에도 빨갱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의 공비 토벌도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나 역시 많은 공비들을 죽였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 아닙니까? 내 친척일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 토벌하러 다니겠소?"

    이현상을 사살한 직후 쌍계사에서 노획한 무기와 사체를 놓고 사령관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차일혁.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일대에는 평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었다.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공고문을 바라보는 차일혁의 머리에 쉼없이 달려온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 평범한 은행원 차일혁,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중국 계림에서 독립투사이자 유명한 아나키스트인 김지강(본명: 김성수)과 함께 한 차일혁(왼쪽).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처가의 소개로 중국 상해로 넘어가 한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차일혁은 1936년 말 운명적인 인물을 만났다.

    바로 독립운동가인 김지강을 만난 것이다.

    그는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후 중국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의열단,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지강은 차일혁에게 김구, 김원봉, 윤세주 등 쟁쟁한 독립투사들을 소개해주고 군관학교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그의 권유에 따라 차일혁은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 중앙군 제1전구 32사단의 포병중대장으로 항일전선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조선으로 진출하고 싶다는 열망에 따라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화북 태항산 일대에서 무장투쟁에 전념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차일혁은 환멸을 느끼던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고 서울로 향했다.

    광복된 조국에서 차일혁은 감옥에서 풀려난 영원한 스승 김지강을 만났다.

    김지강과 차일혁 일행은 먼저 악명높은 일본인 경찰간부 사이가 시치로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사이가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로,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탄압한 일명 '사상경찰의 악마'라고 불린 인물이었다.

    고향으로 내려온 차일혁은 향토방위를 담당하는 청년방위대에서 일하던 중 6.25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인민군을 피해 피난을 가지 않고, 부하들을 규합해 전주 인근에서 인민군 보급차량을 습격하는 등 유격투쟁을 벌인다.

    ◈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전투경찰에 들어가다

    전사한 부하의 영결식장에서 추도사를 읽고 있는 차일혁 대장.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1950년 12월 10일 차일혁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 동지였던 최석용 전북지구 전투사령관의 권유에 따라 제18전투경찰 대대장으로 취임한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며 당시 지리산을 주무대로 빨치산 투쟁을 지휘하는 이현상과 결전을 벌인다.

    그는 2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주시 완산군 구이면에서의 첫 토벌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인다.

    그는 빨치산과의 전투에서는 용감했지만 적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양민을 학살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행위를 엄단했다.

    그가 적을 대하는 방식은 독특했다.

    포로가 된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대해 전향시킨 뒤 자기 부대원으로 배치해 빨치산 부대의 행적을 쫓는데 활용했다.

    이렇게 만든 전향자 부대가 훗날 이현상을 비롯한 거물 빨치산을 소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빨치산이 장악한 칠보발전소 탈환작전을 앞두고는 흥미로운 서신이 날라왔다.

    빨치산 전북도당사령부가 양측 대표가 만나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1중대장 우희갑 경위를 보냈다.

    빨치산 측은 발전소는 인민의 재산이니 서로 파괴하지 말자, 또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비무장요원들이 많은데 관대히 대해준다면 내려 보내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요청을 받아주자 단순부역자나 노약자, 짐꾼들이 하산해 집으로 돌아갔다.

    임실경찰서 시절 획득한 노획품들. 윗줄 왼쪽 끝이 차일혁이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성질이 불같은 차일혁이 싫어하는 것이 3가지 있었다.

    회식 때 일본노래 부르는 것과 적의 목을 따라는 지시, 작전에 지장을 준다고 사찰을 불태우는 일이다.

    전북경비사령부의 이경 보안과장이 물었다.

    "경비사령관이 참석한 회식자리에서 상을 발로 걷어차고 나왔다면서?"
    "간부들이 일본노래 함께 부르는 것이 비위가 상해서 그랬습니다"
    "자네 그 성질 고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할 걸세"

    훗날 그가 경찰서장을 할 때 기관장들의 회식자리에서는 차일혁의 성향을 아는 기관장들은 절대 일본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전북 부안에서 빨치산을 소탕할 때의 일이다.

    도경찰국에서 사살한 적의 목을 잘라와야 전과로 인정하겠다고 통보했다.

    차일혁이 "적을 죽이면 됐지, 목까지 잘라서 뭐하자는 거냐?"고 따져도 소용이 없었다.

    화가 치민 차일혁은 죽은 빨치산 간부 3명의 목을 잘라 소쿠리에 넣은 뒤 발송했다.

    다음날 도경에는 차일혁이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간부들이 상납용으로 특산품을 보냈겠지 하며 침을 삼키고 보자기를 벗기자, 허옇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빨치산 3명의 목이 튀어나왔다.

    공비의 목을 처음 본 간부들은 기겁을 했다.

    소각 명령을 거부하고 지켜낸 화엄사를 1년 후 다시 찾은 차일혁.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한번은 내장산에 작전을 나간 부하들이 유서깊은 내장사를 불태웠다.

    차일혁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부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절대로 절을 불태우지 말라. 절을 태우는데는 한 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는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대신 문짝만을 뜯어내 법당 앞에서 불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이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보 제67호로 조선 숙종 때 건립된 조선시대 건축물의 백미인 각황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98년 6월 20일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사찰을 지킨 차일혁 경무관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졌다.

    차일혁 공적비 제막식.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 허망한 죽음…후배 경찰관들은 친일경찰 대신 차일혁을 선배로 추앙한다

    전쟁이 끝나자 차일혁은 충주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어 1년 반 후에는 충주보다 더 번화하고 규모가 큰 진해경찰서장으로 영전한다.

    이때부터 차일혁에 대한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가 일제시대에 중국에서 팔로군으로 복무했고, 토벌대장 시절 사상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특히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어 지하공작을 시킨 것이 이적행위라는 것이다.

    차일혁은 이 일로 조사를 받자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결국 차일혁은 7개월 만에 좌천되어 충남경찰국 경비과장을 거쳐 1957년 3월 공주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공주에서 차일혁은 예전과 다르게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많이 가졌다.

    운명의 1958년 8월 9일 토요일 공주 금강나루 백사장.

    오전 근무를 끝내고 가족들을 데리고 물놀이에 나선 차일혁은 멋지게 강물 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외쳤다.

    "이 아버지를 잘 봐라~"

    차일혁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0분이 되어도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온 것은 하루가 지나고서였다.

    수색대원들이 무려 1.9㎞나 강을 내려가서야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겨우 38살, 너무나 이른 죽음이었다.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교육원 내 차일혁홀에서 교육받고 있는 차일혁의 경찰 후배들. (사진=경찰청 공식 블로그 제공)

     

    빨치산 토벌작전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어느 부하가 차일혁 대장에게 물었다.

    "공비토벌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랍니까?"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공비토벌이 끝나면 깊은 산속의 절에 들어가 이념의 대결 속에 짓밟힌 무주고혼의 명복을 빌고 내 몸에 스며든 피비린내를 씻고 싶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