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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어린 나이에 두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폭격으로 부모님마저 돌아가셔서 졸지에 고아가 됐습니다. 의지할 곳 없고 배가 고파 거지생활까지 했죠. 식중독에, 동상에, 피부병까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깡통을 부여안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저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거지에서 병원장이 된 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목사. 그는 한국의 헬렌켈러로 불립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일반학교를 다녔고, 세 개의 박사학위를 땄습니다.1986년 실로암 안과병원을 설립해서 지금까지 3만명 가까운 사람에게 개안수술을 해줬고 실명 위기에 처한 35만 명에게 무료로 진료를 해줬습니다. 그래서 지난 8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희망은 절망으로부터 나온다’는 실로암 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를10월 25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6.25 때 부모님 잃고, 폭탄 사고로 두 눈을 잃게 돼[BestNocut_R]▶ 지금도 시력을 잃고 고생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으신가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혀 앞을 못 보는 분들이 20-25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0.2 이하의 실명위기에 있는 저시력자들이 한 5백만이 넘습니다. 이 통계는 저희 실로암 안과병원에서 한 5백명을 대상으로 진료를 해보면 반드시 10% 정도로 0.2 이하의 저시력자분들이 많이 나와요. 그래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실명 위기에 있는 분들을 약 500만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저시력자 분들은 관리하지 않으면 실명할 수도 있는 분들인가요?
그렇습니다. 혹은 당뇨, 백내장, 녹내장, 망막의 문제 등이 있고요. 또는 시골에서 일하다가 눈을 찔리는 경우가 많아요. 벼를 베다가 찔리든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찔리든지 하면 치료 없이 그냥 낫겠지 하고 두어요. 무관심하게 지내다 보면 거기에 상처나 군살이 베기거나 각막의 혼탁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등등의 이유들 때문에 시골에는 실명의 위기에 처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 지난 8월에 받은 ‘막사이사이상’, 축하 많이 받으셨죠?
막사이사이상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도 처음에는 필리핀이 조금 후진국 아닙니까? 그래서 가볍게 봤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국가적인 행사였고요. 록펠러 재단과 연관이 되어있어서 그 위력은 대단해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상이었습니다.
필리핀에 우리 교민들이 많아요. 한 15만 된답니다. 교민분들이 축하를 해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제가 이렇게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상을 받았기 때문에 필리핀에 사는 많은 분들에게 자부심과 기쁨과 소망을 안겨주었다면서 선물도 해주시고 저녁도 잘 대접해주셔서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 시각장애인이 되신 것이 열 살 때였습니까?
1950년 6.25 전쟁이 났습니다. 6.25 전쟁 중에 저의 부모님은 폭격에 의해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친구 일곱 명과 같이 뚝섬에 나가서 오이 따먹고 참외 따먹으러 갔다가 시한폭탄을 건드려서 그것이 폭발을 해서 일곱 명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에 화약을 맞아서 눈이 터졌습니다. 그 때 시력을 잃었고, 다리에 약간의 파편으로 인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 살에 부모를 잃고 시력도 잃고 그야말로 절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는 하루 만에 의식을 회복해서 눈이 안 보여서 ‘이제 나는 죽었구나. 못 살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래도 귀로 들려오는 소리들과 생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 나도 살 수 있다는 자그마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때의 그 희망이 오늘날까지 희망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 고모님 댁에서의 학대, 2년 반의 거지생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실명까지 하신 이후에 생활은 얼마나 힘드셨어요?
실명을 하고 부모를 잃고 살 길이 막막했죠. 그 때 6.25를 겪은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만 서울 시내는 시체로 가득했고, 피난 가다가 아기들을 버리고 가서 엄마 찾아서 우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 때 저는 그것을 보고 ‘전쟁은 저렇게 비극이구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뼈아쁘게 느꼈죠.
근데 그 현실이 저에게도 왔어요. 눈도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 어렵게 땅으로 기어 다니면서 풀을 뜯어먹고 논에 가서 논물을 마시고 하면서 저는 저를 사랑해 주시던 고모님을 찾아갔습니다. 한강 다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낮에는 폭격이 심해 밤에만 배가 다녔는데 몰래 짐 틈에 숨어서 강을 건너 어렵게 고모님댁에 희망을 걸고 찾아갔습니다.
고모님을 만났더니 저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시더니 “너는 이 세상에 살 필요가 없다” 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도 할 수 없고 하니 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소는 눈이 있어서 일을 하고, 개는 눈이 있어서 집을 지키는데, 저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찍 나가서 목을 매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총에 맞아 죽든지, 죽는 것이 제일 좋다는 거예요. 제가 집에 있으면 남도 부끄럽고, 앞 못 보는 사람이 집에 있으면 재수도 없고 하니까 빨리 나가 죽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몇 일동안 고모님 댁에 있는데 얼마나 학대가 심하고, 얼마나 나가 죽으라고 때리던지요. 그 때 아카시아 나무로 벗은 등을 때려서 등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죠. 그래서 지금도 제 등에 상당한 상처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을 떼는 부지깽이로 머리를 때려서 양쪽에 큰 구멍이 나 있습니다.
그런 아픔이 있었고, 먹는 것도 제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잡수시고 남는 찌꺼기를 가져다 주면서 “이것 먹고 살 필요 없으니 죽어라” 라고 하면서 가족들이 다 때리고 참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울타리 밑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고 수없이 많이 울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여기를 나갈 수 있을까 하고 하염없이 울었어요.
그 때 다시 1.4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요. 정부에서 피난을 가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피난을 나가야 하는데 고모네 집도 저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저를 데려갈 수도 없고 집에 놓고 갈 수도 없고 해서 차라리 내일 아침에 밥 한 그릇을 줄 때 찬장 속에 빨래 하다가 남은 양잿물을 밥에 넣어서 먹이고 죽여서 파묻어 버리고 피난 가자고 결정을 했어요. 전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무섭고 떨리던지요.
저는 원래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 때 그 배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고 아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 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 했습니다. ‘고모네 안방에서는 내일 아침에 밥 속에다가 양잿물을 넣어서 저를 죽여 버린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혼자 마루에서 울고 있었어요.
그 때 우리 주님의 음성이 제게 들려오는 것 같았어요. ‘선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일어나 여기를 나가라.’ 그래서 제가 또 다시 기도했더니 ‘선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일어나 여기를 나가라.’ 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때 잡히면 죽을까봐 그 분들이 주무시는 틈을 타서 몰래 도망을 나왔어요. 논두렁을 건너고 밭두렁을 건너고 도망을 나가서 저는 35리를 뛰었습니다.
저는 다음날 아침에 두 손 번쩍 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거지 생활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고 제가 그 때부터 거지 생활을 2년 반을 했습니다.
▶ 혹시 고모님이 생존해 계신가요?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2년 반 동안의 걸인 생활을 하다가, 부산의 아동보호소인 ‘라이트 하우스(빛의 집)’ 라는 곳에 가신 것은 언제인가요?
제가 거지생활을 2년 반 동안 했는데, 마지막 거지생활의 종착역이 부산이었습니다. 그 때 모든 거지들이 다 부산에 모였죠. 왜냐면 부산은 후방이기 때문에 전쟁을 거의 치르지 않아서 저도 거기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서 주로 영도다리라든가 국제시장, 자갈치 시장이 거지들의 집합장소였습니다. 잠은 주로 역 앞이나 추녀 끝에 가서 잤어요.
그 당시 정부에서 거지 소탕작전을 했습니다. 거지들을 다 잡아다가 고아원으로 보내는 그런 정책이 있었어요. 저도 거지생활을 하면서 깡통을 들고 다니는데 어떤 분이 와서 팔을 잡고 차에다 태우더라고요. 그래서 간 곳이 아동보호소였습니다. 거기는 전부 거지들을 붙들어다가 그 성향을 보고서 좋은 고아원이나 나쁜 곳으로 보내는 아동보호소였습니다. 몇 번 도망가고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가족섬’이라는 섬에 보내고 했는데요.
저는 처음 가서 그 곳 아동보호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참석하고, 성경암송도 하고 하니까 거기 원장님이 저를 잘 보셨어요. 그 분이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혹시 너 공부할 생각있냐?”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좋죠. 공부할 수 있으면 해야죠. 어디 그런 곳이 있습니까?” 했더니 “성도에 너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는 곳이 있는데 너를 거기에 보내주마.”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날 원장님의 손을 잡고 나와서 성도에 있는 맹아원에서 하는 ‘라이트 하우스’에 갔어요. 가니까 거기도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 목사님이 저를 인터뷰 하시더니 “야, 너 똑똑하다. 공부하면 잘 하겠다. 성공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거기서 점자를 배우고 한 단계 다른 세계의 삶을 경험을 라이트 하우스에서 하게 됩니다.
◇ 죽음의 위기에서 도와준 한 할머니의 사랑과 기도
ㅊ
▶ 어려운 환경속에 오래 계셔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셨나보죠?
제가 거지 생활을 할 때 어떤 때는 다리에 동상이 걸려서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고름이 나오는데, 그 때 저는 깡통을 붙잡고 ‘하나님, 치료해 주십시오. 치료해 주시면 제가 앞으로 좋은 사람 되겠습니다. ’ 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식중독에 걸려서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하고, 열병에 걸리기도 하고 하던 중에 제가 어느 집에 나무를 쌓아 둔 창고에서 잠을 자는데 거기에 옻나무가 있는 줄 모르고 옻나무 옆에서 잠을 잤어요. 몇 일이 지나고 나니까 온 몸이 옻으로 뒤덮였습니다. 발끝에서부터 전신에 옻이 퍼졌는데 치료를 못하니까 진물이 나는 거예요. 꼭 나환자처럼 썩어가는 느낌을 제가 받았습니다.
그런 몸으로 다니니까 동정하거나 인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고 못된 병 왔다고 물을 끼얹는 분도 있고, 흙을 끼얹는 분도 있고, 막대기로 밀어내는 분도 있고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 그런 경우에 대부분 ‘죽어버리자’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어느 날 아침에 저는 거의 죽음에 왔어요.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뜨거움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저렇게 해는 아침에 떠오르는데 왜 나는 이렇게 죽어야 할까? 왜 나는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할까?’ 하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옻이 오른 것 때문에 죽게 되는 겁니까?’하며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을 잘 믿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저를 보시고 “아이고, 얘야! 너 무서운 옻이 올랐는데 옻독이 들었구나. 이걸 어떻게 하나? 치료 안 하면 죽겠는데...” 라고 하시면서 제 이름을 물어보셔서 알려드렸더니 더러운 제 손을 꽉 잡고 뜨겁게 기도해주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아이 치료해 주시고, 하나님, 이 아이 낫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얘야! 세상에 모든 사람은 너를 버렸지만, 너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너를 안 버렸으니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예수님이 너를 도와주실 것이다.” 라고 기도해주시고 가셨어요.
그 할머니의 그 기도, 뜨거운 손을 잡고 기도하고 나니까 죽음에서 다시 생명으로 바꿔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계속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가셨다가 다시 오셨어요. “아직 여기 있구나. 갔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라고 하시더니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더럽고 냄새나는 제 손을 붙잡고 집으로 데려가셔서 그 옷을 다 벗겨주시고, 닭을 잡아 저에게 먹이시고, 닭물로 목욕을 시키시고, 기도하시면서 얼굴과 온 몸에 난 고름을 다 입으로 빨아내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아이 선태를 사랑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 하시고, 정성껏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그 할머니의 기도와 사랑의 힘으로 그렇게 무섭고 진물이 나오던 것이 4주가 지나니까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저에게 하신 말씀이 “얘야! 나는 돈이 없구나. 하나뿐이 아들이 군대에 가서 지금 소식이 없구나. 나는 그저 남의 논밭 조금에 의지해서 먹고사는 할머니인데, 만일 내가 돈이 있으면 너를 우리 가정에 두어서 눈도 고쳐서 보게 해주고 공부도 시켜줄텐데, 나는 그렇게는 못해서 참 미안하구나. 그런데 너하고 나하고 약속 하나 하자. 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너를 위해서 꼭 기도해줄테니 너는 앞으로 자라서 목사님이 되어서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어라.”라고 하시면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할머니와 헤어졌어요.
저는 그 할머니의 사랑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그때부터 더욱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참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고 희망이 생겨요.
그러면서 다른 거지들을 도와주고 전도하면서 제가 거지 생활을 하다가 아동보호소에 들어갔다가 라이트 하우스에 가서 점자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절망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근원이 된 것입니다.
▶ 그 할머니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라이트 하우스에 가니까 맹인 학생들이 약 70-80명 정도 되었습니다. 거기에 사는 학생들은 다 그 지방에 사는 가족들이 있는 학생들이었어요. 그래서 주말에 집에 갔다오게 되면 사감님에게 선물을 사드려요. 빵도 사다드리고, 사탕도 사다드리고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할 수도 없고 형편도 안 되어서 못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감님이 저를 아주 미워하고 저에게 누명을 씌우고 때리고 청소를 저만 시키고요.
제가 불이익과 억울함을 무척 많이 당했습니다. 그 때 ‘아, 이것이 가난한 자의 설움, 돈 없는 자의 억울함이구나’ 하면서 울었어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서 70명 정도가 한 방에 모였습니다. 거기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고, 윷놀이도 하고, 떡국을 끓여서 나눠먹고, 선생님들이 앞에 앉아서 학생들을 전부다 평가를 하더라고요.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희망이 있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제가 제일 희망이 없다는 평가를 사감으로부터 받았어요.
“저거는 희망이 없어. 점자나 배워서 안마나 하면서 먹고 살면 다행이야. 다른 학생들 공부나 방해하고, 담요에 오줌이나 싸는 학생은 희망이 없어.” 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그 때 라이트 하우스에서 한 15분가면 큰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 계단이 30계단 정도가 있고, 그 앞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나 억울해서 밤에 맨발로 뛰어가서 계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사감님이 저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데 정말 제게 희망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희망이 없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여기서 몸을 바다에 던져 죽겠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희망이 없다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니까 ‘낙심하지 마라. 너는 희망이 있다. 낙심하지 마라.’라는 음성이 들려서 또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말 희망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다’라고 음성이 들려 왔어요. ‘그럼, 하나님! 제가 앞으로 박사도 될 수 있겠습니까?’, ‘낙심하지 마라. 박사도 될 수 있다. 낙심하지 마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더라고요.
그 때 저는 그 음성을 듣고 돌아와서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해야겠다. 내가 박사가 되어야겠다’는 믿음을 가진 희망이 제게 있었습니다. 제가 그 힘을 가지고 점자를 배우고 과정을 마쳐서 꿈을 향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습니다.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올라왔는데 또 한 분의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서울에 와서 어느 전도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그 때가 몇 살 때셨나요?
그 때가 열네 살 때였습니다. 그 전도사님을 만났을 때 저에게 “앞으로 공부할 생각 있냐?”라고 하시기에 듣던 중 너무 반가와서 “네.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마침 선교사 한 분이 계신데 맹아학생을 공부시키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너를 소개해주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분의 손을 잡고 종로 5가에 있는 선교부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면, 한국에 와서 아버지와 아들이 생을 마친 분이세요. 영어로는 ‘클락’이고, 우리말로는 ‘곽안전’이라는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죠. 그 분이 저를 보시고 “너, 공부할 수 있겠다. 똑똑하다. 내가 학교를 들어가면 내가 학비를 대주마.” 라고 하셔서 맹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몇 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와서 공부하라고 한 학교가 제가 졸업한 ‘숭실중고등학교’였습니다. 정상인 학생은 3천명 정도 되는데, 앞 못 보는 학생은 저 하나였습니다. 사실 참 힘들고 어려웠죠. 당시에 가난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맹인들을 위한 책도 없고, 여러 가지 시설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순교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 실로암 안과병원을 통해 2만7천6백여명이 시력 되찾아 ▶ 그러시다가 실로암 안과병원을 1986년에 개원하셨는데, 개원하시는 날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요?
저는 거지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은 점술을 배우라는 분도 있었고, 소매치기를 배우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의 사랑과 기도가 제 귀에 쟁쟁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하면서도 일생을 나처럼 앞 못 보는 분들, 눈 때문에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서 내 삶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 결심과 목표를 위해서 기도했죠.
그리고 아무래도 성직자가 되려면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습니까? 대학에 가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데도 교과서는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신학교에 가서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또 신학대학원에 가서 두 가지 석사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목표인 맹인 교회도 세우고, 젊은 맹인들 980명에게 장학금을 주어 지도자도 길러내었습니다. 목표중 하나인 지금 실로암 안과병원을 세우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선 뜻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좋은 기회를 주셔서 안과병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눈 때문에 고생하는 2만7천6백명이라는 분들에게 개안 수술로 새생명의 밝은 빛을 찾아주었고요. 실명 위기에 놓인 그 분들에게 무료진료를 통해 눈의 고통도 치료하고 실명을 예방한 분이 한 35만명이 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이것을 하게 하기 위해서 절망에서 희망을 주시고 살려주셨다고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실로암 안과병원은 날로 발전해서 지금 세 기관이 있어요. 하나는 중국 연변에 병원을 세워서 우리 교민들과 본토인들을 무료 개안수술을 하고 실명예방하고요. 한 군데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병원이 있고요. 또 하나는 46인승 리무진 버스를 기증받았습니다.
버스에 병원을 차려서 농촌, 어촌, 섬 지역, 나환자 정착촌, 교도소, 감호소, 변두리 지역을 다니면서 1년에 40주간을 나가서 현지에서 진료하고 현지에서 수술을 해서 빛을 찾아주고 고통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1년에 800명 내지 1천명을 수술하고, 1만명에서 1만5천명을 진료하는 큰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 개안수술을 받고 광명을 되찾은 분들은 그 감동이 어떨까요?
제가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마다 회진을 합니다. 그러면 캄캄해서 도움을 받아 부축을 받고 병원에 들어왔던 분이 눈 안대를 떼면 보이니까 깜짝 놀랍니다. “어이구, 원장님 얼굴이 보입니다.” 좋아하면서 제 손을 잡고 “제가 제2의 인생을 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고요.
어떤 분들은 주머니의 돈을 다 꺼내서 저를 주고 가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진료 받으러 오시면서 사과를 사오기도 하시고, 쥬스를 사오기도 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와같은 일을 하기위해서 하나님을 저를 살리셨다는 생각을 할 때 참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그래서 저는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여기에서 느낍니다.
▶ 그럼 혹시 김선태 목사님 본인의 눈을 개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아마 제가 그 당시에 전쟁이 아니었다면 치료해서 어느 정도 시력이 나왔을 겁니다. 전쟁 때라 진료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이미 신경도 마비가 되었고, 망막도 망가지고 해서 저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 아마 볼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영안의 세계를 바라보고, 제가 꿈을 꾸게 되면 제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일이 있어요. 꿈 속에서 봅니다. 저는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실로암 아이센터’ 통해 한국과 아시아의 많은 맹인들에게 새생명 주고싶어▶ 많은 일들을 혼자서만 다 하신 것만은 아니고 주변 분들이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분들이 참 많이 고마우시죠?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재산이 많아서 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 개안 수술로 빛을 찾아주는 데는 30만원이 듭니다. 이것은 수술 받을 때 수정체와 약품 일부의 값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생일 기념, 환갑 기념, 졸업 기념, 결혼 기념, 일일 찻집, 바자회, 어떤 분들은 폐품을 주어 모아서 판 돈 등을 모아 주시는 그 사랑의 헌금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분은 하루에 만 원씩 저금을 해서 보내주시기도 하셔서 그 헌금들이 이렇게 큰 일을 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저희 병원은 이제 어려운 환자에 한해서는 진료도 수술도 다 무료로 해드립니다. 30만원이라는 돈은 저희 병원 운영비도 아니고 눈을 잘 보이게 해주는 수정체 값에 불과합니다. 저희 병원은 적자가 나야만 설립정신이 살아나는 병원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제가 나이가 일흔이 다되어갑니다. 저에게는 마지막 하나의 기도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실로암 안과병원 자리에다가 ‘실로암 아이(eye)센터’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네 배 정도 큰 공간을 만들어서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맹인들에게까지도 선교하면서 실명예방하고 수술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뜻있는 많은 분들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돈은 다 모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실 것으로 믿고 금년 12월에 착공을 하고 2009년에 완공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한국 사회에 바치고 아시아에 바쳐서 아시아와 한국의 ‘눈’센터가 되려고 합니다.
더불어 이 방송을 들으시고 눈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진료를 못 받는 분들은 언제든지 실로암 안과병원으로 연락해 주세요.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 김선태 목사님도 그렇지만 가족분들의 희생과 나눔도 얼마나 귀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저에게 시집오겠다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신앙이 좋고 인물이 아름답고 희생적인 사람을 택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제 아내를 만나고 참 제 맘에 딱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야말로 요즘 말로 하면 낚아챘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해서 지금 딸이 둘 있습니다. 두 딸이 다 음악을 하고, 또 제가 예전의 한경직 목사님이나 피어선 목사님처럼 어려운 희망있는 학생들을 도와서 딸을 삼고 아들을 삼았어요. 저도 그처럼 믿음의 딸과 아들들이 퍽 여럿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외롭지 않고 삶의 보람도 느끼고 즐거움도 느끼게 됩니다.
▶ 실명되신 분들의 삶이 참 많이 어려운 경우가 많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또 내가 모든 자격을 갖춰 놓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바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사십시오.” 라고 강조를 합니다. 사실 우리 맹인사회도 많이 발전을 해서 수준 높게 사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33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라는 책을 내셨는데요. 제목은 어떤 뜻인가요?
이것은 제가 대학을 들어가려고 할 때 5.16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군사정부인데, 학사들은 학사고시를 치르고 시각 장애인들은 국가고시를 치러야 하는데 그 당시에 저는 그 자격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국가고시를 치러서 대학을 가려고 원서를 냈는데 그것이 기각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는 절망과 낙심속에 기도를 하고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께 “이것은 제가 해결을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믿음과 신념 용기 하나 가지고 책가방을 들고 문교부를 33번 찾아 갔습니다.
장학관과 생명을 걸고 싸워 이겨서 대학 시험을 봤기 때문에 그것을 제목으로 해서 ‘33번의 도전 끝에 이룬 신화’라는 책을 냈습니다.그래도 재밌었어요. 장학관 책상 앞에 가서 영어 단어 외우고 공부하고 같이 퇴근하고요. 간간이 전화도 받아주고요. 숨은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 그래서 아무런 후회나 아쉬움도 없으실까 궁금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데 삶의 철학이 되고 도움이 크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과 고생을 했기 때문에요. 선교사님이 학비는 주신다고 할찌라도 생활비는 별로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루에 어떤 때는 한 끼만 먹기도 하고 굶을 때도 있고요.
또 제가 신학교 다닐 때는 너무나 가난해서 뒷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순을 잘라먹고 할 때가 많았고, 어떤 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학교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무릎 꿇고 “하나님, 배고파 죽겠습니다. 제가 언제 따뜻한 국에다 밥 좀 실컷 먹을 날이 있겠습니까? 떡 좀 실컷 먹을 날이 있겠습니까?”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 저에게 큰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정이 너무나도 감사해요.
▶ 무엇보다 ‘실로암 아이센터’를 빨리 개원하시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시겠어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아이센터를 세우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치료와 육적인 치료, 심리치료, 재활치료를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그 일환으로 제가 막사이사이상 받으러 가서 필리핀 마닐라에 안과병원을 하나 세우기로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방 둘을 빌려서 의사 한 분, 간호사 두 분을 채용하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 절망에 빠져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사랑하는 여러분들, 언제든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꿈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언제나 마음속에 용기를 가지세요. 꿈을 가지시고 희망을 가지셔서 앞에 있는 희망과 축복의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삶을 사시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