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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애하는 ‘나의 독재자’ 전상서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기억하지 못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설경구 박해일 주연의 영화 ‘나의 독재자’께.

    먼저 죄송하다는 말부터 전해야 할 듯싶습니다. 당신을 직접 만나기 전에 가졌던 지레짐작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 영화계에서 ‘남북 분단의 상품화’가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와중에, 그대 역시 이러한 행태를 오롯이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미안함보다 더욱 커다란 크기의 고마움이 밀려듭니다.

    유행이라는 이름 아래 겉모습만 수시로 바뀔 뿐 속에 품은 목적, 즉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어서 나를 사라”고 유혹하는 것이 상품이라면, 그대는 그 치밀한 반복의 고리 가운데 약한 곳을 끊고 깨어난 ‘광대’입니다.

    그 까닭은 남북 분단이라는 상처를 소위 지배계급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어떻게 도구로 써 왔는지, 그 와중에 머리채를 붙잡히고 무릎 꿇릴 수밖에 없던 절대 다수가 왜 꿈을 빼앗긴 채 사회적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촌철살인의 유머를 곁들여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당신은 크게 무명배우 성근(설경구)의 눈에 비친 1970년대, 그리고 성근이 장성한 아들 태식(박해일)과 함께 티격태격 살아가는 1990년대라는 두 시대상을 비추고 있더군요.

    이야기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한반도에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불어오던 때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코자 북한 김일성 주석의 대역을 뽑아 리허설을 준비했다는 설정은, 진위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엄혹한 시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주인공 성근이 김일성 대역으로 뽑히는 과정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입니다. “특별한 연극을 준비 중”이라는 말에 이끌려 오디션 장소에 모여든 성근을 비롯한 무명배우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당합니다.

    눈이 가려진 채 어딘가로 끌려간 배우들이 총부리를 들이대며 “오리 꽥꽥”을 복창하라는 군인들의 요구에 일말의 저항도 없이 응하는 장면이나, 막무가내로 “너의 죄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고문 기술자 앞에서 “연극에 미쳐 부모 자식을 돌보지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 짖는 성근의 모습 등은 억압이 일상이 된 비뚤어진 사회를 드러내는 우화로 다가오더군요.

     

    결국 유신 선포를 기점으로 남북정상회담 얘기는 흐지부지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위대한 연극의 주인공’에 낙점됐던 성근은 쓸모없이 버려집니다.

    국가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성근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맡았던 연극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자신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시간은 덧없이 흘러 흘러 20여 년 뒤인 1994년을 사는 성근의 아들 태식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돈은 희망도 행복도 아닌 목숨이다. 세상은 남의 목숨을 빼앗아 내 목숨을 지키는 전쟁터”라고 다단계 회사 판매원들을 앞에 둔 단상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태식의 모습은 1990년대 세계화 광풍에 휩쓸려 급격하게 물질만능화 하던 한국 사회 구성원의 전형입니다.

    태식은 양복을 빼입고 외제차를 타고 다니지만, 실상은 사채업자에게 몸을 담보로 잡힌 신세죠. 당시 도시 개발 붐 속에서 아버지 명의로 된 집 한 채가 그 대상에 포함됐다는 것을 알게 된 태식. 그는 그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할 목적으로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모셔오고 바로 작전에 착수합니다.

    김일성으로 화한 성근은 아들과 함께 살면서 포복절도할 만한 촌극을 빚어냅니다. 하지만 이를 보면서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던 것은 저뿐이었을까요.

    “염소의 젖은 인민의 젖”이라며 자급자족을 위해 집에서 염소를 키우도록 지시하고, 현지지도라며 마트에 들어가 “인민에게 풀어야지 물자를 이렇게 쌓아두기만 하면 어떻게 하냐”며 성을 내고, 두서없이 재개발 반대만 외쳐대는 원주민들을 보고는 아들에게 은밀하게 “남조선 인민들을 의식화 조직화하라”는 특명을 내리는 성근의 일화는 성장만능과 양극화의 덫에서 허우적대는 한국 사회, 넓게는 전 지구적 문제를 상기시키더군요.

    정권은 바뀌어도 그 구성원들은 바뀌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성근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위대한 연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정부 고위 관계자가 다시 찾아오니까요. 그리고 성근은 수십 년째 이어 온 연극의 막을 내릴 준비에 들어갑니다.

    애매모호하게 가족이나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뻔하디 뻔한 결말에서 벗어난 엔딩은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근은 자신을 휘감고 있던 굴욕의 삶을 훌훌 벗어던집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본 태식 역시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아닌 현재에 단단히 발붙이게 되는 모습이더군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신은 내내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이고,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입니다. 총살형 직전의 한 사형수가 마지막 담배를 거절하며 “이제 담배를 끊을 생각”이라고 했다는 프로이트 식의 농담이 떠오릅니다. 쾌감과 불쾌를 동시에 준다고 해야 할까요.

    이러한 모순을 품은 그대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성 있는 삶에 대한 작지만 뚜렷한 윤곽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듯합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 걸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표어에 몹시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잘 봐야 한다. 현재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슬로건도 있습니다. 이는 “기억하지 못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죠.

    극중 성근이 살던 1972년, 그로부터 20여 년 뒤 그의 아들 태식이 발붙이고 있던 1994년, 그리고 거기서 20여 년을 더 나아가면 우리가 숨쉬는 현재의 2014년이 있습니다. 성근이 살던 과거는 태식이 사는 현재를 낳았으니, 결국 성근과 태식의 과거는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라는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는 셈입니다.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그 이듬해 삼품백화점이 붕괴되면서 한국 사회는 끝을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꼭 20년 뒤인 2014년, 우리는 세월호 참사로 수백 명의 꽃다운 목숨이 스러져가는 것을 TV 화면을 통해 발만 동동 굴리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결코 잊지 말자”고 약속한지 겨우 수개월이 지났건만, “이제는 슬픔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야 할 때 아니냐”라는 말이 슬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그대, 나의 독재자는 그 기억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진, 지금 우리 삶이 걸린 과거의 가치를 일깨워 준 첫 상업 영화로 기억될 그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그럼 이만 총총.

    추신 : 당신은 배우 설경구와 박해일이 희극에 대한 절묘한 연기 감각을 지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했습니다. 이들 두 배우에게 있어서도 그대는 연기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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