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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간신히 살아남았던 사건을 다소 충격적인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아성범죄는 지금껏 수많은 뉴스와 신문을 장식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영화 ‘도가니’는 달랐다.
영화는 사건의 간접 목격자이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잊고서 방관자로 살던 대중들을 직접적인 목격자로 만들었다. 기억 속에 흐릿하게 잠재하던 사건을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현실로 만들었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시 분노했다.
영화는 당시 언론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각종 의혹들과 피의자들이 버젓이 살고 있는 현실을 들춰냈다.
이를 본 많은 네티즌들은 약자인 장애아동을 외면하고 가해자에게는 솜방망이 처벌한 경찰과 검찰을 비난하고 재수사를 요청해 법의 단죄를 촉구하고 나섰다.
결국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던 피의자들을 다시 심판대에 서게 됐고, 광주시 교육청은 전체 교사 20명 중 6명의 교사를 해임, 정직 등 중징계 조치했다. 실제 사건이 벌어졌던 광주 인화학교는 곧 폐쇄될 예정이다.
‘도가니 효과’로 장애인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 등의 ‘도가니법’ 개정요구도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각종 보호시설 실태조사가 들어가면서 지역 곳곳에 묻혀 있던 장애인 대상 범죄 사건들이 드러나게 됐다.
대중들은 그동안 수많은 ‘도가니’가 도처에 널려있었음에도 감지하지 못했거나 방관하며 살았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14년 전 무참히 살해된 10대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주목됐던 주한 미군 자녀를 둘러싼 사건을 다룬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시 도피했던 용의자는 시간이 흘러 혼란이 어서 수습되길 바랐겠지만 한 편의 영화로 다시 세상의 이목을 받게 됐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뒤늦게나마 법무부는 유력 용의자로 의심됐던 패터슨에 대해 미국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고, 공소시효를 불과 6개월 앞두고 결국 그는 체포됐다.
이 영화 역시 파급력은 용의자 체포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지적됐다시피 주한미군과 그 가족에 대해서는 신병확보는커녕 초동수사도 할 수 없는 SOFA 규정의 재개정에 대한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범인을 결국 잡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완료되면서 미제로 끝났지만 앞으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범죄 실화를 보여주며, 사람들의 기억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 1991년도에 있었던 9살 이형호 군의 유괴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그 놈 목소리’, 21년 전 개구리 잡으러 갔다 실종된 소년들을 다룬 영화 ‘아이들..’이 바로 그것이다.[BestNocut_R]
이렇게 죄의식과 폭력만이 가득한 사건만 영화로 재구성돼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사형수와 사랑을 키워나가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순수한 시골 총각과 에이즈 걸린 다방 레지와의 이야기 ‘너는 내 운명’도 실화를 바탕으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감동적인 스토리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동시에 영화가 실화라는 것을 밝히면서 몰입도를 증가시킨 두 편의 영화는 사형제도 존폐문제를 다시 여론화시켰고, 마치 병균처럼 취급하던 에이즈 환자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주인공이 슬플 때 관객도 슬퍼하고 분노할 때 함께 분노하고 아플 때 같이 아파하면서 영화보다 훨씬 지독하게 아픈 현실을 들여다보게 된다.
당시 인물들이 그 때 그 사건을 어떤 태도로 대면하는지 확인하고, 그 태도가 다음 세대로 전이돼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 목격함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