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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니 나는 역적이 됐고 가족은 거지가 됐다"
14일 오전 11시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 기념회에서 이근안(74)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 실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씨는 전두환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인사를 고문하면서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에는 유년시절과 경찰에 입문하게 된 계기, 대공업무를 하며 남민전, 민청학련 사건을 처리하는 등 자신의 걸어온 인생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갖가지 기술을 사용해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하는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면서 두려움을 느꼈던 걸까. 영화를 본 관객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는 시점과 맞물려 열린 이날 출판 기념회에서 이 씨의 눈빛은 몹시 떨렸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는 적지 않은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이 씨는 출판 기념회에서 "그 당시 간첩과 사상범을 잡는 것은 애국이었다"면서 "그것이 애국이 아니면 누가 열심히 목숨을 내놓고 일했겠느냐"고 자신의 고문 행위를 정당화하려 애썼다.
그는 "세월이 지나 정치형태가 바뀌니까 내가 역적이 되고 이 멍에를 고스란히 지고 살아가고 있다"면서 "그 바람에 가족들도 거지가 되다 시피 살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심문하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냈다.
그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김 전 의원을 수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류를 검토해봤다"며 "북한과의 연계에 대한 증거가 없어 접촉인물 등을 고려해 재야세력이 뭉친 지하조직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 수사에 착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의원에게 물고문을 해도 소용이 없어 트릭을 썼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트릭은 전기고문을 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썼다는 것.
그는 "당신같은 사람은 전기로 지져야한다. 겁을 잔뜩 줘 놓고선 배터리 하나면 불도 지를 수 있다"고 협박한 뒤 "소위 대공분실에서 사용한다던 칠성판에 묶고 발가락에 호일을 감고 소금물을 붓고 대면 짜릿하다. 그랬더니 금방 잘못했다며 전부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고문 뒤 김 전 의원에게 민청학련 조직 계보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영화 '남영동 1985'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이 씨는 "영화를 보면 물고문과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이 나오는데 고춧가루는 안해봐서 잘 모른다"면서 "나는 물고문 할 때 주전자로 조금씩 부었는데 영화에서는 아예 수도꼭지 호스째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젓가락으로 맞으나 몽둥이로 맞으나 맞는 건 똑같다"면서 "내가 저렇게 악질이었나 생각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울었다"며 후회를 나타냈다. 이어 "간첩이라도 절대 쥐어박아서는 안되는데 쥐어박았으니 잘못이다. 애국행위인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이제 외톨이로 남아서 멍에를 져야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씨는 자서전을 쓴 계기에 대해 "나를 악마로 모는 사람들 중에는 조사한 기억도 없는데 고문당했다고 하는 사람, 크게 부풀려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 알몸을 드러내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래서 신앙고백을 겸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는데 남영동 영화를 보고 자서전이 아니라 고백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BestNocut_R]
또 그는 "복역 중에 김근태 당시 장관이 여주교도소에 와서 만난적이 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자 김 장관이 포옹을 하며 '그게 어디 개인의 잘못입니까. 시대의 잘못이지'라는 말을 했다"며 "그가 나를 용서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고문 피해자들에 대해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죄는 못해도 '종교적인 회개의 삶'을 통해서 사죄를 하고 있다"면서 "죄인이라는 생각 때문에 목사가 됐고 이 행사 끝나면 다시 깊은 산속에 들어가 생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