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 만큼 권리를 갖는 것이 상식이라면, 열정을 펼치면서 적은 임금을 감수하라는 '열정페이'는 비상식이 된다.
이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창작의 고통을 열정페이로 희석시키는 것은, 결국 그 고통을 배가시키는 악순환을 낳기 마련이다.
올해는 영화 현장의 스태프들에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적용해 만들어진 영화가 개봉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 원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표준근로계약의 핵심은 시급제로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다. 결국 일한 만큼의 정당한 권리를 얻는다는 상식의 목소리인 셈이다.
2월 13일 선보인 영화 '관능의 법칙'(감독 권칠인, 제작 명필름)은 촬영 단계서부터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한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앞서 지난해 4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4대 영화 배급사,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영화계의 표준근로계약서 이행과 관련한 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기획단계에 있던 관능의 법칙은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을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이듬해 표준근로계약서를 이행한 첫 영화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관능의 법칙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정원찬 명필름 제작이사는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왜 하필 우리 영화야'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적용해 보니 작업 효율성을 높이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컸다"고 전했다.
2년 5개월 동안 제작된 관능의 법칙은 순제작비가 29억 원 들었는데,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으로 제작비가 1억 2,000만 원가량 늘었다. 정 이사는 "표준근로계약서 이행에 따른 제작비 상승분 역시 촬영 전 철저한 준비 과정 등을 통해 경비를 절약함으로써 상쇄할 수 있었다"고 했다.
표준근로계약서의 핵심은 스태프 각자가 일한 양을 시간 단위로 계산해 지급하는 시급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정 이사에 따르면 관능의 법칙은 2012년 영화계 임금협약에 따른 최저시급 5,300원을 적용했다. 기존에 그 이상을 받던 스태프는 임금을 유지하는 선에서, 그 이하에 머물던 스태프는 최저시급을 맞춰 주는 선에서 상향평준화를 도모했다.
"이에 따라 막내 스태프의 경우 인건비가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250%까지 늘었다"고 정 이사는 전했다.
◈ 정해진 근로시간 "철저한 사전 준비로 현장 능률·효율 끌어올려"
영화 '관능의 법칙'의 한 장면. (사진=명필름 제공)
영화산업협력위원회의 보고서 '2012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2012년 9월 24일부터 11월 20일까지 영화 제작현장·후반작업회사를 방문해 598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영화 참여에 따른 응답자의 평균 소득은 1,107만 원. 후반작업 분야를 제외한 팀장급 이하 스태프들의 연평균 수입은 916만 원에 그쳤다.
이에 반해 하루 평균으로 봤을 때 영화 제작기간 스태프들의 근로시간은 13.9시간, 야간 근로시간은 5.5시간에 달했다.
이를 주당 평균 근로시간으로 환산하면 75시간인데, 법적 근로시간(주당 40시간)을 훌쩍 넘어선 수치다. 초과근무수당을 주면서 일을 시킬 수 있는 주당 최대 근무시간(52시간)까지도 크게 웃돈다.
표준근로계약서는 스태프에게 임금을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의 4대 보험 가입도 의무화했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은 영화 현장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 이사는 "촬영 시작과 종료 시간이 정해져 있다보니 현장에 활력과 긴장이 넘치는 분위기였다"며 "일주일에 하루는 꼭 쉬었고, 일하는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해져 늘어지는 일 없이 현장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전했다.
17일 개봉하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제작 JK필름)은 기획단계를 포함한 전 제작 과정에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한 첫 영화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윤제균 감독은 "하루 12시간 일하고, 더 많이 일하면 수당 주고, 4대 보험을 막내까지 모두 적용하고,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면서 인간답게 제대로 일하자는 취지로 도입했다"며 "전체 제작비가 3억 원가량 상승했지만, 철저한 사전 준비 덕에 구성원간 신뢰도가 높아지는 효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예전에 이틀 밤을 넘기면서 촬영할 때는 '영화라는 게 사람 할 짓이 못 되는구나'고 느꼈는데, 이번에는 '영화를 평생 직업으로 가져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앞으로 우리 영화사에서 하는 작품은 무조건 표준계약서를 도입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따른 시행착오가 크지는 않았을까. 명필름 정 이사는 "현장에 새로운 제도가 들어왔을 때 기존 관행과 섞이는 것이 관건인데, 무리 없이 잘 녹아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요즘 영화 현장은 12시간 이상 촬영하는 곳이 많지 않고, 시급으로 임금을 주는 경향도 확대되고 있다"며 "이미 합리적으로 돌아가던 현장 분위기를 따라오지 못하던 인건비 책정 등을 개선하는 측면이 컸다"고 했다.
◈ 도입 확산 선결 과제 "당연히 드는 비용 인식 변화 중요"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사진=JK필름 제공)
표준근로계약서가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는 데는 영화계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다.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은 현재 대형 투자·배급사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CJ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올해 표준근로계약을 이행한 작품이 17편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제균 감독은 "투자사들이 2억~3억 원의 추가 제작비가 발생한다는 것만 수용하면 모든 스태프들이 인간답게 일하면서 재밌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며 "이러한 분위기는 완성된 영화에 플러스가 됐으면 됐지, 결코 마이너스가 되지 앟는다"고 강조했다.
정원찬 이사도 "너무 싸게 책정됐던 스태프 인건비를 현실화시키는 측면에서, 30억 원 규모의 영화에 1억 2,000만 원을 보태는 것은 엄청난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며 "대형 투자·배급사들 사이에서는 이 비용을 기본비용으로 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무엇보다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당연히 써야 하는 비용이라는 인식 변화가 중요해 보인다"고 역설했다.
표준근로계약서의 도입 폭을 넓히는 데는 몇 가지 개선점이 필요해 보인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정책적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먼저 4대 보험 의무 가입의 경우 현장 스태프들이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관능의 법칙의 경우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는 데 따른 추가 제작비 1억 2,000만 원 가운데 4대 보험료가 30%를 차지했다.
정 이사는 "스태프들은 인건비에서 4대 보험료가 나가는 점을 몹시 부담스러워 했는데, 그들의 인건비를 보험료만큼 올려 준 뒤에야 설득할 수 있었다"며 "특히 6개월간 고용 상태에 있어야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고용보험의 경우 촬영기간이 불규칙한 스태프들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필요성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의 특수성을 고려한 4대 보험 적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는 "계약직, 프리랜서가 주를 이루는 문화예술계 종사자에 대해 고용보험 적용기준을 완화하는 등의 조치가 요구된다"며 "현장에 고용되지 않는 기간에 고용보험 보장이 폭넓게 작용돼야 그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10억 원 미만의 제작비가 드는 저예산 독립영화에까지 표준근로계약서를 적용하기 어려운 현실도 걸림돌이다.
"일반적인 상업영화는 1억 2,000만 원이라는 추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저예산 영화는 제작비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되니 적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합의가 필요해 보인다"는 것이 정 이사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