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드럼스틱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비극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청년은 왜 저 위험한 곳에 서게 됐을까. 혹시 저 스틱의 반대편 끝에서 누군가가 "더! 더!"를 외치며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위플래쉬'의 영문판 포스터 속 드럼스틱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관객 각자의 가치관과 입장에 따라 엄혹한 세상도, 예술혼도, 초월해야 할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 청년이 지금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유명 음악대학 신입생인 청년의 이름은 앤드류(마일즈 텔러).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는 앤드류는 우연한 기회에 플렛처 교수(J.K. 시몬스)의 눈에 들어 그가 지휘하는 교내 최고의 밴드에 들어간다.
플렛처 교수는 모두가 알아 주는 최고의 실력자이지만, 학생들에게 인종·계급·성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무소불위의 폭군이다. 앤드류는 플렛처 교수의 폭언과 학대에 좌절하면서도, 교수가 조금이라도 살갑게 대해 주면 금새 무언가 이뤄낸 듯한 성취감에 휩싸인다. 자신도 모르게 플렛처 교수에게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헤어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는 친절한 아버지를 둔 앤드류에게 플렛처 교수는 '제2의 아버지'다.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 '대타자' 등으로 묘사되는 존재인 아버지는 가족, 사회와 같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도덕률, 가치관의 화신이다.
널리 알려진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린 자식이 사랑하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처절한 경쟁을 벌인다고 전한다. 자식은 아버지가 자기를 거세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탓에 적대감을 갖지만, 끝내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순응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우리는 한 청년이 아버지, 즉 주류 사회의 권위에 순응함으로써 뛰어난 드러머가 된다는 따분한 이야기로 영화 위플래쉬를 이해해야 할까? 그랬다면 이 영화가 소위 '오포세대'로 불리우는 젊은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개봉 5일 만에 33만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사진=㈜에이든 컴퍼니 제공)
위플래쉬를 본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데는 순응이 아니라 '전복'이라는 보다 강렬한 메시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전복의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는 이 영화의 엔딩 시퀀스 직전까지도, 앤드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권위에 순응하는 현대 젊은이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앤드류는 구성원들을 치열한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볼 때 좋은 대학, 최고의 밴드에 속해 있다는 것을 주변에 과시하려 애쓰고, 경쟁자의 아픔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긴다.
자기 리듬이 아니라, 누군가(아마도 열에 아홉은 권력자일 것이다)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 비트를 따르려고만 하니 앤드류의 삶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최고의 경지에 올라 일류가 되겠다"는 그의 욕망은 경쟁자들을 무찔러야만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불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점차 자기 템포를 잃고 무한경쟁에 내몰리던 앤드류의 삶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엄격한 아버지'는 바닥을 친 자식들을 결코 동정할 줄 모른다. 감언이설을 섞어가며 무장해제를 시킨 뒤 더 밑바닥으로 떨어뜨려 아예 헤어날 수 없게 만들기 일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