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수의견'을 연출한 김성제 감독이 23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24일 개봉한 영화 '소수의견'의 연출자인 김성제(46) 감독이 공식적인 인터뷰를 마친 뒤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제가 원래 건조함, 차가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영화도 감성이 짙은 걸 선호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소수의견을 하면서는 촬영 현장에서 '영화 색이 건조한 것 아니냐'는 말을 꽤 들었어요. 이 영화는 그렇게 찍는 게 옳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거든요."
'연출자로서의 책무 같은 것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그랬던 것 같다"고 답했다.
"책무를 다른 말로 하면 상식, 염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수의견은 더도 덜도 말고 상식과 염치의 선을 지켰을 때 가장 큰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영화라고 믿었으니까요."
영화 소수의견의 개봉을 하루 앞둔 23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 감독이 들려 준, 그의 영화와 삶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전한다.
▶ 용산참사에 모티브를 뒀음에도 영화 도입부에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자막을 넣은 이유는.= 원래 없던 건데 이번에 개봉을 앞두고 넣은 것이다. 그 자막이 중의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우리 영화는 촬영을 마치고 2년이나 개봉이 미뤄지면서 여러 차례 구설에 휘말렸다. 아주 오랜 기간 용산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점도 부각됐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봐 온 관객들은 소수의견이 용산참사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 할 텐데, 도입부 자막이 이러한 인식을 환기시켜 줄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자막을 본 뒤 '정말 허구야?'라는 생각에 영화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출의 일환인 셈이다. 그 자막을 넣을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소수의견이 2년 전에 개봉했다면 아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 극중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짚어본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어떻게 수습되고 해결되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최근의 메르스 사태까지 반복되는 비극을 해결하는 방식이 비상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우리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적인 화법을 통해 관객들과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 작가 손아람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어떻게 영화화를 추진하게 됐나.= 2011년인가, 사회인 야구단을 소재로 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엎은 날이었다. 함께 작업을 하던 분을 만나 그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은 책"이라며 소설 소수의견을 건네더라. 당시에는 원작을 두고 영화 작업을 한 적도, 할 생각도 없던 터였지만, 읽어보니 확 끌렸다. 작가님도 만났는데 이심전심으로 통하더라.
'하얀 거탑'이라는 드라마가 있잖나.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 야심에 찬 의료인들이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로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소수의견 역시 법정 드라마라는 큰 줄기가 있지만, 그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들의 욕망, 정치적인 인물들의 야심을 보여 주면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 극중 국민참여재판을 묘사하는 데 특별히 공들인 모습이다.= 영화적으로 잘 표현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지난 2일 제작보고회 때 "소수의견을 박력 있는 법정드라마로 만들고 싶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당시 배우들조차 영화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최근 시사회를 가지면서도 "박력이 어디에 있다는 거냐"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제가 생각한 박력의 중심에는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한 시민들을 검사, 변호인이 설득하는 과정에서의 흥미진진한 묘사가 있었다.
국민참여재판뿐 아니라 법정에 앉아 있는 판사의 모습도 제대로 그려보고 싶었다. 제가 영화 준비를 위해 수많은 재판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판사들이 굉장히 피곤해 보이고 신경질적이라는 점이다. 반말은 예사다. 그러한 부분이 몹시 권위적으로 다가오더라. 한 번은 재판장에서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반발로 훈계를 하는 젊은 판사를 보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극중 판사를 연기한 권해효 선배를 통해 그러한 전지전능한 권위의 민낯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준익 감독님의 '황산벌'(2003)이 나왔을 때 보면서 느낀 게 '감독님이 지난 10년간 했던 말들이 영화 속 수많은 사람을 통해 다 나오네'라는 거였다. 소수의견도 비슷한 것 같다. 극중 "중국집이 탕수육으로 돈 버냐, 짜장면으로 벌지" 같은 대사는 제가 일상에서 쓰던 말이다.
가장 마음이 가는 장면은 변호인 윤진원(윤계상)이 기자 공수경(김옥빈)에게 "기자잖아요. 나는 변호사고"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에 앞서 공수경은 "기자는 미안하기 시작하면 기사 못 쓴다"고 한다. 윤진원의 이 말은 "기자는 기자의 길이 있고, 변호사는 변호사의 길이 있다"는, 서로를 100% 이해했다기 보다는 각자의 입장을 존중해 주는 특별한 공기를 품고 있다. 그 공기가 몹시 좋았다.
영화 '소수의견' 스틸(사진=하리마오픽쳐스 제공)
▶ 2년간 개봉을 기다리면서 힘이 빠졌을 법도 하다.= 소수의견 전에도 많은 작품이 엎어지면서 밑바닥을 쳤다. 이 영화 역시 투자를 받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촬영도 여타 상업영화보다 타이트하게 진행됐다. 그렇게 만든 영화를 개봉할 수 없으니 정말 속상하더라. '영화가 제대로 안 나와서 그런가'라는 자괴감을 버텨내는 게 가장 힘들었고, 함께했던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몹시 미안했다.
지난해 1월 모든 작업을 다 끝내놓은 뒤 제주도에 가서 1년 반을 살다가 왔다. 행복했던 시간이다. 개봉 못하면 영화계를 떠날 생각까지 했다. 저를 달리게 한 엔진이 사라지는 거니까.
▶ 개봉이 늦어지는 와중에 터진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는 어땠나.= 제가 제주도로 내려가기 일주일 전에 터졌다. 참담했다. 영화는 이미 완성돼 있었기에 세월호 참사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소수의견을 다시 보면서 '이 영화는 결국 한국 사회가 이러한 참사, 사태를 해결하는 비상식적인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더라.
▶ 소수의견이 첫 연출작인데, 감독에 대한 꿈을 꾸준히 키워 온 것인가.= 프로듀서로서 마지막 작품이 '혈의 누'(2005)다. 다음 기획은 연출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2003년인데, 그런 이유로 혈의 누 각본을 2년 이상 공들여 썼다. 원래 감독이 하고 싶어서 영화계에 투신한 것은 아니지만, 마케팅에서 제작부, 프로듀서를 거치면서 연출에 대한 욕망을 발견했다.
▶ 영화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사에 입사한 게 1997년이다. (웃음)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대학 때 영화동아리를 만든 게 계기였다. 동아리라고 만들었지만, 다들 영화를 몰랐다. 명절 때 성룡 영화보고, 아카데미상 받은 것 보던 게 전부였으니까. 영화과 1학년은 무슨 책으로 공부하는지 알아내서 보는데, 아는 영화가 없더라. (웃음) 그 뒤로 불법 비디오 테이프로 시네마테크 영화를 꾸준히 봤는데, 영화가 점점 좋아졌다.
그때까지도 영화를 직업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심리학과를 나왔다. 백수건달처럼 지내다가 뒤늦게 과 공부에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심리학과를 나오면 공부를 계속하거나 리서치 회사, 대행사에 많이 갔다. 그쪽에 취직도 할 뻔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중에 과장쯤 돼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며 "그때 영화를 했어야 하는데…"라고 후회하는 제 모습이 그려지더라.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김성제 감독(사진=황진환 기자)
▶ 혈의 누를 비롯해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간첩 리철진'(1999) 등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들이 소위 비주류의 삶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비주류의 삶을 그렸다기보다는 영화적 감성에 충실한 영화였다고 본다. 프로듀서로서 아이템을 잡거나 기획을 할 때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게 '이 영화에 걸맞은 감독은 누굴까?'였다. 제가 염두에 뒀던 지점에서 어긋나는 경험을 하면서는 아쉬움도 있었다. 한 번은 이준익 감독님에게 물었는데, "감독하는 데 면허증이 어딨냐"고 하시더라. 연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게 그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