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이 최근 서울 청량리동 연구소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1930년대 항일 무장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에서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자신을 "한국독립군 이청천 부대 제3지대 저격수"라고 소개한다. 실존인물인 이청천 장군의 본명은 지청천(1888~1957). 그의 외손자가 현재 역사학자로 활동 중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59) 연구위원이다.
최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난 이준식 위원은 외조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당시 정부 파견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가 졸업하셨죠. 그 뒤 일본군 중위로 국외에서 복무하시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접하고는 그해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십니다. 그곳에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셨어요. 1930년대에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셨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셨죠. 제 어머니 역시 임시정부에서 여성광복군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 위원은 영화 암살을 두 차례 봤다고 했다. "반가웠고 고마웠다"는 것이 그의 감상평이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많지 않았잖아요.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 임시정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정권을 홍보하는 국책영화였다는 점에서 별 의미가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관객들이 부담 없이 재밌게 볼 수 있는 만듦새를 지녔다는 것이 암살의 강점으로 다가오더군요. 뛰어난 재미와 분명한 메시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덕이죠.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입장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영화 암살이 반갑고 고마웠던 이유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제대로 다룬 영화가 앞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봤으니까요."
▶ 영화 암살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 경성에서 암살단을 돕던 아네모네 카페 주인(김혜숙)이 자살하는 장면이다. 배우의 연기도 좋았고,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모습이 내내 겹쳐져 감동을 받았다. 경성 한복판에서 일제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였던 김상옥(1890~1923) 의사의 마지막 모습이 그랬을 것 같더라. 이런 식으로 조국해방에 목숨을 바친 무명의 독립전사들이 한 분 한 분 그 장면에 겹쳐졌다.
▶ 기차역사에서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이 일장기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은 어떻게 다가오던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비슷한 풍경을 강요하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일침으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 1933년에는 그런 의례가 없던 것으로 안다. 일제 강점 말기 들어 생긴 건데,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사람이 서서 황군을 위한 묵도를 했다고 한다. 학자의 입장에서는 그 장면이 다소 의아했던 이유다. (웃음)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해방 뒤 일제에 부역한 악질적인 친일파를 조사하기 위해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암살에서 다뤄진 점은 특히 인상적이더라.= 반민특위를 다룬 첫 실사영화일 것이다. 정면으로 다루기 어려워 피해 왔던 소재였다는 점에서 아쉬웠는데, 이 영화에 몹시 고마운 부분이다. 반민특위에 대해 모르거나 희미하게 알던 이들이 영화를 통해 그 존재를 접하고, 왜 실패로 끝났는지 알게 된다면 그 또한 큰 성과다.
▶ 반민특위 등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와해되면서 친일청산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청산 작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보편적이다. 보통 청산 작업은 해당 역사가 마감된 직후 이뤄져 온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특이하게 일제 통치라는 잘못된 역사를 마감한 뒤에도 이를 청산하지 못한 채 70년을 보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반포돼 친일인사에 대한 처벌법을 만든 데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만든 이들이 "친일문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국민의 요구가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한민당 등 유력 정치 세력의 극심한 반대에도 반민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 당시 친일인사 처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컸음에도 아쉽게도 반민특위는 실패의 역사로 남았다.= 반민특위는 그 안에서 친일인사에 대한 조사와 기소, 재판이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승만은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 친일파였기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반민특위를 극열히 반대했다. 급기야 친일경찰 출신으로 해방 뒤에도 경찰 요직에 있던 노덕술 등 심복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애국자를 체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특위 활동은 무력화됐고 일부 친일인사들에 대한 사법처리만 이뤄진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특위를 해체시키면서 미약했던 사법처리마저도 무효화 된다. 영화 암살은 반민특위가 무력화 되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극중 "나야말로 애국자"라고 말하는 염석진(이정재)처럼, 친일인사들은 "친일은 애국이었다"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탄압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던 게 사실이다.
▶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극중 백범 김구(1876~1949)와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손을 잡고 암살단을 조직한다. 당대 이 둘의 협업이 실제로 가능했나.= 1933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구 선생과 김원봉 선생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공주의자요 민족주의자인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라는 틀 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반면 무정부주의에 가깝던 김원봉 선생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고 의열투쟁을 벌였다. 둘은 1930년대 말 비로소 협력을 논의하고 1940년대 들어 손을 잡았다. 영화는 실제 역사를 6, 7년 정도 앞당긴 셈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노선이 달랐던 두 인물이 다가오던 해방을 위해 손을 맞잡은 일대 사건을 영화에서 다뤘다는 점은 의미가 남다르다.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지금까지 1930년대 치열했던 항일 무장투쟁사는 잘 알려지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1931년과 32년은 독립운동 흐름의 분기점이었다. 앞서 독립운동 세력은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봤고, 그 전쟁이 독립의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1931년 9월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독립군은 이를 다가올 대전의 서막으로 보고 만주를 중심으로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인다. 이러한 흐름은 1932년을 거쳐 33년까지 고조됐는데, 독립운동가들의 기대와 달리 일제는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장시켜 갔다. 그러면서 1933년 무렵에 "독립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분위기가 자리잡게 되는데, 이를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의 의열투쟁으로 돌파해 간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주변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일본이 만주를 중심으로 중국 내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경계하던 중국 국민당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게 된다. 의열투쟁은 역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었는데, 프랑스 측은 "임시정부가 불법적인 활동만 하지 않으면 용인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열강의 입장에서 볼 때 테러를 일으켰으니,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묵인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가 항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됐다.
▶ 1930년대 무장투쟁은 왜 중요했나.= 영화 암살에서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이 "친일파 한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라고 묻자 안옥윤이 "알려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말을 하지 않나. 의열투쟁은 "독립운동가들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목숨 바쳐 싸우고 있다"는 것을 국내 민중에게 알려 준 중요한 일이었다. 독립을 위한 불씨를 이어가는 것, 그것이 최대 목표요 최대 성과였다. 당시 만주에서도 수십, 수백 차례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당장의 독립을 위한 것보다는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촉매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체로 항일 무장투쟁사하면 1920년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한국독립군, 조선혁명군 얘기를 하면 끝이다. 우리의 역사 교육이 위인전 식으로 유명한 분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장투쟁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않고 피 흘리며 스러져가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이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이름 없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암살은 역사교육이 하지 못하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외조부, 어머니의 영향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졌을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심이 갔던 건 사실이지만, 독립운동사를 다루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 피했다는 말이 맞다. 외조부, 어머니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제가 이를 공부한다는 게 머뭇거려지더라. 제 관심사는 '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까'에 맞춰져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민중을 중심에 둔 독립운동사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름 석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헌신하신 분들의 역사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에서였다. 그때도 일부러 무장투쟁사는 피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강의를 해도 외조부님 얘기를 의식적으로 안하려 했는데, 10년 전 '그것 자체가 편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 무장투쟁사에 관심을 갖고 글도 쓰고 강의도 하기 시작했다.
▶ 결국 그 시대를 얘기할 때 무장투쟁사를 빼놓을 수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 보면 결국 민중 전체의 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후의 길은 무장투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조국,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서는 맞서 싸우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 그러한 무장투쟁사가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온 이유는 뭘까. =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 분단이 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쓸 수 없는 말들이 많이 생겼다. 지리적·정치적 분단을 넘어선 이념적 분단에 따른 결과다. 특정 말을 쓰면 이념적으로 편향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동무' '동지'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혁명'이라는 말도 꺼리게 됐다. 우스갯소리로 박정희 정권 때 "혁명은 하나"라고 했다. 지금은 쿠데타로 부르는 '5·16'을 두고 하는 말이다. '투쟁'이라는 말도 쓰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그 연장선에서 무장투쟁이라는 표현에도 심리적인 거부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무장투쟁이라는 말은 당대에도 주로 쓰인 중립적 표현이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북한에서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근현대사를 정리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결국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부터 쓰인 말을 하면 '종북'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 한국 현대사가 피로 점철된 데는 일제의 잔재를 제때,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라는 지적이 높은데.= 역사 교육은 역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결국 역사를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100년 전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그대는 어떻게 처신할 텐가?" "독립운동을 위한 고난의 길을 택할 것이냐, 매국노 이완용의 편안한 길을 택할 것이냐?"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더라도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 등등. 해방 뒤 70년의 한국사가 뒤틀린 것은 역사를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나라가 망해 가는 상황에서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이들을 두고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이 최근 서울 청량리동 연구소 전시관에서 일제시대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지금은 친일파가 구조화됐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해방 직후 이를 청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했지만,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당시 반민특위에서 사법처리를 통해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정기간 만이라도 관료로 진출할 수 없도록 제한했어도 친일청산, 민족통합의 길이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조차 거치지 못하면서 친일파는 성찰 없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역으로 "친일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을 몇 십년간 지속해 왔고, 결국 그 세력이 한국 사회에서 구조화됐다.
친일파의 후예들이 혈연, 학연 등으로 엮여 기득권층이 되면서 친일청산을 외치는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최대 불행인 셈이다. 얼마 전에도 여당 대표가 "한국 근현대사 교육은 잘못됐다"는 식의 발언을 했는데, 결국 "친일을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잘못됐다"는 말과 다름없다. 친일청산을 외치는 사람을 두고 종북주의자라고 폄훼하는 사람이 집권여당의 대표로 있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 한국 근현대사 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와 닿는다.= 정부가 역사 교육에 손을 대려 한다는 점이 몹시 우려스럽다. 자라나는 세대가 세상을 보는 눈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제가 20, 30년전 혈기왕성하던 때 학부 강의를 하면 첫 시간에 늘 하던 말이 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고,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고 고민해라. 그것이 비판이다."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 교육도 이러한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역사를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건전한 시민의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친일청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사에 관한 올바른 정보를 얻고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사람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지난 반 세기 이상 친일이 구조화 되면서 올바른 흐름을 왜곡하는 세력이 강고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