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자료사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가 실망스런 결과를 내면서 한일관계는 현재의 냉각국면이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일국교정상화 50년, 광복 70년을 맞는 상징적인 해에 아베 총리가 진일보한 담화 발표로 선순환적 발전을 불러오길 기대했지만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에도 크게 못 미치는 내용이었다.
아베 총리는 14일 “앞선 대전(大戰)에서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おわび 오와비)의 마음을 표명해왔다”고 밝혔다.
이는 일본 정부가 무라야마 담화에서 처음 공식화한 ‘반성’과 ‘사죄’를 재확인한 것이긴 하지만 아베 총리의 직접 사죄는 아니었다.
무라야마 담화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런 역사의 사실(식민지배, 침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다만 아베 총리가 “이런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일종의 ‘역진 방지’ 약속을 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아베 총리는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는 했다.
“다시 전쟁의 참화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는 두 번 다시 사용돼선 안 된다”고 한 부분이다.
그는 “식민지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권이 존중받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주어가 빠진 제3자적인 유체이탈적인 화법으로 식민지배와 침략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반성과 사죄의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다”며 “무라야마 담화보다 내용 면에서 상당히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반성과 사죄의 문구 사이사이에는 오히려 과거사를 미화하는 역사 수정주의적 주장이 교묘하게 배치됐다.
일례로 담화는 일본이 아시아 최초의 입헌정치와 서구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낸 사실을 기술했고, 러일전쟁 승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을 고무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과 병탄 시도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사실에 대해선 침묵했다.
특히 러일전쟁은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두 열강이 충돌한 결과일 뿐 아시아․아프리카인들의 운명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베 담화는 일본이 만주 침략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 데는 나름대로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음을 은연중에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대공황이 일어나 구미 국가들이 식민지 경제를 포함한 경제 블록화를 진행하면서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한 것은 미국에게도 불편한 대목일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이런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은 “(인구의 8할이 넘는) 전후세대에 사죄라는 숙명을 계속 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한 대목에서 위험 수위에 이른다.
이는 사실상 일본의 전쟁 책임은 거의 이행됐고 더 사죄할 이유는 없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 언론도 일제히 비판적인 논조를 취했고 미국 백악관 정도만 거의 유일하게 환영 입장을 나타내는 상황이다.
정부는 이번 담화에 대한 판단과 대응이 향후 양국관계에 중대 분수령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극도로 신중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론이 좋지 않은데다 정부가 그동안 누차 밝혀온 ‘역대 내각 담화의 역사인식 계승’ 원칙에 크게 못 미친다는 점에서 비판적 입장으로 정리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여야 정치권도 각각 “아쉽다”거나 “매우 실망스럽다”며 대체로 부정적 반응이다.
중국 외교부도 14일 공식 논평을 통해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하라”고 일본에 촉구했다. {RELNEWS:right}
다만 미국과 중국의 각축 속에서 한일관계 경색이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현실적 부담이 간단치 않은 문제다.
이번 기회마저 무위에 그칠 경우 한일 간에는 관계 접근을 시도할 마땅한 계기를 한동안 찾기 힘들 수 있다.
연내 빠르고 편리한 시기에 하기로 했던 한중일 정상회담도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이와 관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이 변함이 없을 것이란 아베 담화의 내용을 강조했다.
이에 윤 장관은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해 일본 측의 추가적인 노력을 전제로 한 긍정적 신호를 보낸 것이란 해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