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고위급 접촉(사진=통일부)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극적으로 타결된 이번 협상 과정에서 체제 정당성에 대한 북한의 민감성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말했다.
미국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빅터 차 한국석좌는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에 대한 북한의 유별난 집착을 이번 합의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25일 미국의 소리 방송에 말했다.
차 석좌는 "북한이 포격 도발로 인한 한국의 보복사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오직 확성기 중단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한 건 매우 흥미로운 점"이라고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지낸 차 석좌는 "김정은 체제가 정권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민감하다"며, "김정은의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뷰'에 대해 북한이 보였던 격앙된 반응을 예를 들었다.
차 석좌는 "북한이 지뢰 도발에 대한 인정이나 직접적인 사과 대신 유감을 표시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이는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등 과거 도발 때 보였던 태도보다 훨씬 진일보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랠프 코사 전략국제문제연구소 (CSIS) 태평양포럼 소장 역시 "이번 협상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정조준한 확성기 방송에 대한 북한의 두려움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코사 소장은 "확성기 방송을 둘러싼 갈등 속에 북한이 '새로운 한국’과 맞닥뜨리게 됐으며, 보복 조치를 공언하면서 더욱 단호하고 강한 태도로 나오는 한국의 기세에 한 발 물러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북한에 출구를 제공하면서 지뢰 도발에 대한 인정과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 것은 현명한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프랭크 자누지 맨스필드재단 대표는 "이번 협상 타결을 어느 일방의 승리라기 보다 남북한 모두 이득을 본 '윈-윈' 회담"으로 평가했다.
자누지 대표는 "북한은 한국으로부터 관심을 이끌어냄으로써 관계 개선을 향한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고, 한국은 북한의 도발에 맞서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일방적으로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특히 "비교적 젊고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 제1비서로서는 남북 간 대등한 협상 과정을 국내에서 정통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누지 대표는 "북한의 유감 표명이 완전한 사과에는 못 미치지만, 정전협정 위반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보여준 위기 대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긴장 고조를 막았을 뿐아니라 북한의 엄포에 굴복하지 않고 양보를 얻어냈다"고 지적했다.
자누지 대표는 "박 대통령이 북한으로부터 얻어낸 더욱 중요한 양보는 사과 자체보다 이산가족 상봉 재개와 당국 간 회담, 민간교류 활성화 합의 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는 장기적으로 한반도 통일과 비핵화의 밑거름이 될 환경을 조성하는 조치들"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북한이 이번 합의를 제대로 준수할지 여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빅터 차 석좌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북한이 9월 열기로 합의한 적십자 실무접촉이 첫 시금석이 될 것"이라면서 "확성기 방송 중단 요구를 관철시킨 북한이 이후 가족 상봉 행사에 대가를 요구하는 등 태도를 바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누지 대표도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남북 경협과 교류 등과 관련해 약속을 어긴 전례가 한 두 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앞으로 가족 상봉과 당국 간 회담이 실제로 열리고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자제하는지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