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춘희막이' 의 박혁지 감독이 지난 18일 오전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박혁지(44) 감독이 최막이(90)·김춘희(71) 할머니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때는 2008년, 한 지역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지난 18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박 감독은 "휴먼 다큐의 아이템 발굴을 해 오면서 직관적으로 캐릭터가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무척 대조적인 성격의 두 분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 끌렸어요. 그러던 차에 한 방송국으로부터 긴 시간을 할애 받아 휴먼 다큐를 내보낼 기회가 생겼고, 아껴 왔던 두 할머니 아이템을 제작하기로 결정했죠."
막이와 춘희 할머니는 본처와 후처로 맺어진 얄궂은 인연이다.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지만, 두 여인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46년을 함께 살고 있다.
이러한 사연이 카메라에 담겨져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 할머니나 그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을까.
박 감독은 "두 분과의 첫 만남은 2009년 3월 초로 다소 쌀쌀했다"며 "사시는 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큰 어머니(막이)가 한 차례 경험이 있다며 고사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큰 어머니는 조선시대 여인이세요. '여자가 이런 것들은 하면 안 된다'는 게 확실한 분이시죠. 두 분이 장에 나가면 관계를 두고 여전히 수근대는 목소리가 있는데, 제가 붙으면 더욱 도드라지니 "남사스럽다"는 것이 그 분의 표현이었죠. 그런데 정에 약하시기 때문인지 살갑게 대하고 부탁드리고 하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시나브로 촬영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두 할머니를 2주 동안 카메라에 담아 내놓은 2부작 휴먼 다큐멘터리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커다란 아쉬움이 밀려왔다고 한다. 그렇게 2011년 12월 두 분을 다시 찾아 2년간 촬영했고, 오는 3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춘희막이'로 열매를 맺었다.
▶ 어떠한 아쉬움이 두 분의 삶을 영화로까지 만들도록 이끌었나.=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방송용 다큐는 큰 어머니가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찍으면서 계속 작은 엄마를 다시 보게 되더라. 동네 이웃분들은 물론 자제분들조차 정신 연령이 낮은 작은 엄마(춘희 할머니)에 대한 어떤 선을 갖고 있다. 어린 아이 같이 장난스럽고 밥만 밝히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더라. 어른 같은 말을 하시는 모습도 찍었다. 무엇이 됐든 두 할머니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보여드리고 싶었다. 영화는 작은 엄마에게 51%를 할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년을 지켜봤는데, 아직도 작은 엄마를 확실히 아는 데는 실패했다.
▶ 촬영을 마무리하고 두 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큰 어머니께서는 갖고 계신 생각도 큰 어른이시다. 주변에서는 그런 큰 어머니가 작은 엄마를 거둬서 데리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는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갖고 접근했고, 결과물이 나온 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서로 말 없이 지지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큰 어머니 역시 작은 엄마라는 대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고 계신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라. 그 감정이 뭔지는 모르겠다. 사랑, 애증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쌓여 온 새로운 공동체 같은 느낌이었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살다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공동체 말이다.
▶ 두 분이 사시는 지역의 특징이 있다면.= 경북 영덕의 한 마을이다. 기차역도 고속도로도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라는 느낌이었다. 동네에 사시는 분들 대부분이 독거노인이시다. 젊은 사람이 없으니 빠르게 생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촬영 원본이 180시간에 달한다고 들었다. 편집하면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선별한 기준은.= 촬영 분량이 많았지만, 제가 기다리던 장면들은 분명했기에 편집 과정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매번 식사를 하실 때조차도 두 분의 진심이 나오는 순간 순간이 있다. 사실 촬영의 대부분은 식사하시고, 밭일 하시는 일상이었다. 큰 이벤트가 장에 나가시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사시는 두 분의 일상 하나 하나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다가왔다.
▶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면 시간순으로 편집한 것 같지만, 춘희 할머니의 머리 스타일 등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더라. 어떤 효과를 바란 건지.= 이야기의 중심에 작은 엄마가 계시기 때문이다. 작은 엄마의 삶은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기에 몹시 궁금했다. 그 분이 어떤 상황과 위치에 계신지 초반에 설명을 하려는 의도가 컸다. 촬영하면서 터닝 포인트 같은 데가 큰 어머니께서 작은 엄마에게 돈을 가르치시는 장면이었다. 촬영한지 6, 7개월 지나면서였다. 기다리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는데, 큰 어머니가 갑자기 돈을 꺼내시더니 "이건 얼마고, 이건 얼마"라고 하시는 거다. 이를 받아들이는 작은 엄마의 "몰라요, 몰라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큰 할머니의 부재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다가오더라. '우리 그냥 계속 하던 대로 합시다'라는 듯이 말이다. 그 지점이 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다큐 영화 '춘희막이' 스틸컷(사진=하이하버픽쳐스 제공)
▶ 영화 제목에 춘희 할머니의 성함이 먼저 나온 것도 그러한 이유인가.= 그렇다. 물론 어감상으로도 지금의 배열이 좋다. 무엇보다 두 분이 분리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성함을 접속사 없이 사용하려 했다. 두 분은 함께 계셔야만 서로의 결핍된 부분을 채울 수 있다는 느낌을 제목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영화를 보는 내내 고령화된 시골의 풍경이 오롯이 드러난다. 현장에 오래 있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두 할머니 외에 마을 어르신들의 동의도 필요했다. 어르신들은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온다는 것에 몹시 반가워하셨다. 따분하고 느린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제가 인사를 열심히 하고 다니니 관심을 가져 주시더라. 할머니 댁에 고정적으로 오시는 이웃분들에게는 제가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PD, 연출자의 개념을 모르시는 그분들은 저를 "박기자"라고 부르셨다. 그곳에는 마을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녔다. 제 차가 있으니 어르신들이 "장에 간장 하나마 사러 가자" "안과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고 많이들 하셨다. 먼 거리가 아니니 모셔다 드리면 몹시 좋아들 하셨다. 묵은 된장도 싸 주시고, 그곳 마을에 방 하나 얻어 살면서 정도 많이 들었다.
▶ 완성된 영화를 보신 두 할머니의 반응은.=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오셔서 영화를 처음 보셨다. 전화도 드렸는데, 거리가 꽤 멀어서 기대를 크게 하지는 않았었다. 큰 어머니께서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영화에도 나오는 작은 엄마 소생의 따님이 두 분을 모시고 왔다. 큰 어머니께서 멀미가 심하셔서 차를 오래 못 타신다. 그래서 영화를 보시면서도 힘들어하셨다. 작은 엄마는 자기들 모습이 나오는 걸 보면서 떠드시다가 상영 10여 분 만에 주무시더라. (웃음) 영화를 보신 뒤 큰 어머니께서 "고생했데이. 잘 봤다"고 짤막하게 말씀하시더라. 원래 장황하게 말씀 안하시는 분이라는 걸 알지만, '마음에 안 드시나'라고 골똘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웃음)
▶ 막이, 춘희 할머니를 부르는 호칭이 인상적이다. 연락은 계속 이어오고 있나.
= 영화에 등장하는 윤숙 씨라는 따님도, 제사 장면에서 나오는 두 아들도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 그래서 막이 할머니는 진중하게 큰 어머니, 춘희 할머니는 가볍게 작은 엄마라고 부른다. 큰 어머니는 저를 "기자야"라고 하시는데, 요즘은 가끔 "박씨"라고 부르신다. 작은 엄마는 호칭을 자주 가르쳐 드렸는데, 잘 못하시고 그냥 "어이야"라고 하신다. 촬영 때만큼 자주 찾아뵙지 못하지만, 전화로 간단히 안부를 여쭙고 있다. 귀가 어두우셔서 오래 통화는 못하신다. 멀지 않은 동네에 사는 따님에게 소식을 듣기도 하고, 전달할 이야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박혁지 감독(사진=황진환 기자)
▶ 두 할머니가 맺어 온 관계의 본질은 뭐라고 보는지.= 본처와 후처라는, 큰 어머니와 작은 엄마의 관계는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맺어졌다. 지금도 표면적으로 존재하고,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이 내내 드러난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두 분만의 연대가 계속 이뤄져 왔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 연대는 상황에 따라 모녀 같기도, 자매나 친구 같기도 하다. 제가 느끼는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조금 알고 계신 분들이라는 점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이미 굳어졌지만, 속에 품은 진심은 계속 깊어져 가는 관계. 저 역시 두 분을 지켜보면서 그 진심에 깊이 감동했다. 저 역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진심을 보인다는 게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두 할머니는 서로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마음을 쓴다는 점에서 지구상에 유일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 남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탄생기로도 다가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