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절정이던 지난 8일, 경북 경산시 팔공산에는 전날부터 시작된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절기상 입동인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니 체감기온은 영하(零下)처럼 느껴졌다.
수능을 앞둔 학부모들이 팔공산 갓바위를 많이 찾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날씨에도 사람들이 모였을까.
이런 생각도 잠시, 팔공산 입구에 도착하자 우산과 비옷을 챙긴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갓바위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기우'였다.
주차장에서 30분가량 산길과 계단을 올랐다. 천여개의 계단을 지나니 높이 4m에 머리에 갓 형상의 넓은 돌을 얹은 갓바위가 장엄하게 앉아 있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갓바위의 정식 명칭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으로 우리나라 보물 제431호이기도 하다.
갓바위를 향해 기도중인 사람들.
비를 막아줄 천막도 없이 얼굴과 옷이 땀과 비에 젖어 물기가 흥건했지만, 학부모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갓바위를 관리하고 있는 선본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래도 비 때문에 평소 주말보다 사람이 절반 이상 적은 편이다'라고 귀띔했다.
올해 수능을 치는 딸 민경이를 위해 주말마다 갓바위에 오르는 박용덕·황대순씨 부부(대구 달서구)는 갓바위에 도착하자 준비한 쌀을 시주하고 정성스레 초에 불을 밝혔다.
이후 자리에 앉은 황대순씨는 기도문을 외운 뒤 정성스레 108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함께 온 남편 박용덕씨는 아내가 비에 맞지 않게 옆에서 묵묵히 우산을 씌워 주었다.
기도하고 있는 아내 황대순씨 옆에서 묵묵히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박용덕씨.
"'한가지 소원은 꼭 이뤄진다' 그러더라"
두 시간가량 기도를 마친 아내 황대순씨가 웃으며 말했다. 황씨는 "비가 온다고 미뤄질 수도 없고, 늦춰질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으니까 오늘 같은 날은 꼭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 365일을 의미하는 1,365 계단을 딸의 수능 기도를 하며 올라온 이상진·유선희씨 부부(창원 성산구)에게도 비와 가파른 계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선희씨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내가 힘든 만큼 애는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걸음 한걸음 기도하면서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고 했다. 유씨는 그동안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안 하고 잘 버텨준 딸에게 꼭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바위에 동전을 붙이며 기도중인 모습.
갓바위 옆을 보니 수많은 동전들이 바위에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동전을 붙인 것인데 이게 떨어지지 않으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바위 앞에서 한참을 서 계시던 어머니 한 분도 동전을 조심스레 붙이고 정성스레 기도를 올렸다.
갓바위 아래 마련된 유리광전에서도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CCTV로 연결된 TV 모니터에서 나오는 갓바위 화면을 보면서 연신 기도를 올렸다. 비를 피하면서 기도를 올릴 수 있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 보였다. 선본사 관계자는 갓바위에 있던 사람들도 해가 지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말했다.
갓바위 아래 유리광전에서 기도중인 사람들.
부산에서 대구까지 아들의 수능 기도를 위해 달려온 류화수·김말이 부부(부산 동래구)에게 갓바위는 많은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몇 해 전 딸의 수능 기도를 위해 갓바위에 오른 적이 있던 부부는 그때 이뤄졌던 소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류화수씨는 지난 1977년 자신의 대학 진학 기도를 위해 어머니께서 갓바위에 올라오셨었기에 이곳에 대한 의미가 남달랐다.
김말이씨는 "마음이 안쓰럽고 오히려 아들이 지금 더 불안할 건데 부모로서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이런 일(기도)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부부는 민성이에게 "마음 편히 시험 잘 치고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비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져도 수험생 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