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로 서거하자 SNS에서도 애도의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트위터에는 언론사의 서거관련 보도를 속보로 리트윗하는 글들이 이어지고 있고 페이스북에는 개인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소회나 애도, 지나간 행보에 대한 평가들이 줄을 잇고 있다.
YS에 대한 평가는 공과 과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공의 첫 번째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YS는 자유당 공천으로 25세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을 탈당하면서 야당 인사의 길을 걸었다.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양대축으로 상징적인 존재였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면서 야당을 젊은 야당으로 변모시켰고 1979년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가 경찰에 끌려나가는 'YH 사건'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박탈당했다. YS는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YS는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도 당했다. 제1야당의 당수로서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를 통해 "민중혁명으로 이란의 팔레비왕정 체제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며 한국도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발단이 돼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9월29일 김영삼 의원에 대한 제명 방침을 정했고, 같은 해 10월4일 여당의원 159명이 '김영삼 의원 징계안'을 10분만에 기습 처리했다. 부마항쟁의 서막이 올랐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절명했다.
YS는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인 1980년 사실상 강제 정계은퇴를 당한 뒤 두차례 장기간 연금되었고,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1983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데 이어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6월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DJ. YS간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대선에서 패배했다. 88년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기도 했지만 1990년 1월 '3당야합'으로 민주화에 역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자료사진)
김 전 대통령은 '구국의 결단'을 명분으로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을 합쳐 민자당을 창당하면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의
명분을 내세웠다.
YS는 92년 민자당 대선후보로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이 꿈'이었다던 YS는 1954년 의회에 입성하고 난 뒤 38년만에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YS는 대통령 초기 누구도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어붙였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 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나섰는데 당시 하룻밤새 떨어진 별이 50개에 이를 정도였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던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리를 밝혀냈고 12.12와 5.17을 군사쿠데타로 규정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또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금융실명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1993년 8월 12일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
를 발동, 당일 오후 8시부터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 시행한 것이다.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으로 돌려보냈고 북한의 김일성과 정상회담에 합의했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취임 3년차인 1995년에는 지방자치제도를 확대해 광역과 기초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초를 열었다.
YS는 또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고 지방 곳곳의 대통령 안가를 철수하는 권위주의 타파에도 나섰다.
그러나 임기 5년의 대통령이라는 한계와 3당 야합으로 탄생한 정권의 한계는 나무나 컸다.
특히 1996년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 기구(OECD)에 아시아에서 일본에서 이어 두번째로 가입하면서 외환위기의 씨앗을 뿌렸다.
1996년 한총련 사태로 대대적인 학생운동권 검거에 나서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김 전 대통령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힘이 빠지면서 우경 본색을 드러냈다. 1996년말 안기부법, 노동법을 날치기 시도하면서 거대한 역풍을 자초했다.
'소통령'으로 불리던 아들 현철 씨가 청와대와 국정원 등에 측근들을 앉히고 사실상 국정을 농단한다는 비판을 들었고, 한보비리특혜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권력말기 '식물대통령'이 되었다.
특히 아들이 현철씨가 구속된 정권 마지막 해인 1997년의 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금융기관의 부실, 방만한 경영을 해온 대기업의 연쇄부도, 단기외채의 급증 등으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사실상 경제주권을 내줘야만 했다.
YS 정부가 임기내 1인당 1만 달러 소득과 OECD 가입이라는 치적에만 관심을 쏟다보니 국내 경제시스템과 금융체질을 강화하지 못한 채 자본시장을 성급하게 개방하면서 초래한 위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YS 정권 내내 대형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안았다. 1993년 취임직후부터 터진 구포열차사고로 7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해 10월10일 여객선 서해 페리호가 전북 부안군 앞바다에서 침몰해 29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1994년 10월21일에는 서울 성수대교 붕괴되는 초유의 사고가 일어났다. 또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장
가스폭발로 101명이 사망했고, 6월 29일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무려 501명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사고가 있었다. 1997년 8월6일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괌에서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229명 사망했다.
시사평론가 김용민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사진출처= 김용민 페이스북)
YS의 이런 공과에 대해 SNS에서는 애도의 분위기와 추모의 열기가 달아오른다.
시사평론가 김용민씨는 페이스북에 "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몇 분 안 된 시점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군내 사조직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및 금융실명제 도입 등 투명성 강화, 전두환 노태우 구속 등의 족적은, 한계 또한 있었으나 한국 현대사를 바른 길로 이끈 동력이었습니다. 본인은 원치 않았겠지만 민주정부 10년도 YS가 세운 초석, 닦은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고 평가합니다.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게다가 사람은 없고 괴물만 남은 이 땅의 사악한 보수들 틈바구니에 선 민초로서는...
돌아가셔서 슬플 마지막 전직 대통령입니다"라며 애도했다.
김용익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트위터(@yikim1952)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22일 0시22분 서울대병원서에서 서거하셨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에 커다란 공과 과가 있지만 현대사에서 지울 수는 없는 분입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는 트윗을 했다.
트위터 ID CA**A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이로써 민주화 투쟁을 한 대통령들은 모두 서거하고 악마같은 대통령들은 여전히 잘 살아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항일애국지사 자녀는 배고프고 친일매국노 자손은 잘사는 대한민국 모습처럼 보입니다"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소식.영욕이 많았던 분입니다.문민정부를 이루어 군사독재를 끝냈지만 군사독재 세력과 결탁한 것은 이 시대를 더욱 아프고 슬픈 그림자를 드리운 계기가 됐죠. 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거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는 면치 못할것 같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의 페이스북에는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사진출처 = 김현철씨 페이스북)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의 페이스북에는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 나라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대통령, 반드시 재평가 받아야 하는 대통령님 이제는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라거나 "김영삼대통령님의 서거를 가슴깊이 애도합니다. .유족분들께도 심심한 위로를보내며. .금융실명제는 몸소 겪었던 당시은행원으로 YS만 하실수있었던 대한민국근대역사 입니다"라는 글도 보인다.
{RELNEWS:right}YS지지자였던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젊었을때 김영상 대통령을 많이 존경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군정종식을 외치며 대통령이 되고 한국사회의 큰 획을 그으며 개혁을 할때 엄청나게 크게 감동하며 지지했드랬습니다 .. 임기 마지막즈음 IMF 사태를 맞으며 고생을 많이 하시고 그 엄청난 업적이 가려지고 그럴때 마음이 참으로 아팠었다"고 했다.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김영삼 전대통령님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고인은 진정 거인이었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 오직 한길로 헌신하신 고인의 높은 기개와 정신이 길이 빛나고 대도무문의 거침없었던 민주화의 열정과 과거청산의 정신이 사후에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길 기원드립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