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YS) 서거 사흘째인 24일까지 북한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YS 집권기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악화된 남북관계에 따른 '앙갚음'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YS는 집권 초 '민족이 우선'이라며 이인모 노인 송환을 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였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대북정책이 상당히 틀어졌다"며 "당시 관계를 볼 때 북한 입장에서 조의를 표할 가능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은 김일성 사후 조문파동이 불거지는 등 대북 강경론이 압도했던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특히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안 좋은 추억'이 각인됐다"고 말했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노태우정권 때만 해도 7·7선언이나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등 성과가 있었지만, YS 때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며 "북한은 특히 김일성 사후 우리 쪽 정치상황이 보수강경화한 것을 불쾌해 한다"고 설명했다.
YS는 1993년 2월 취임하면서 "어느 동맹국보다도 민족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선언했고, 다음달 19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송환했다. 노태우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이어받아 94년 7월 남북 정상회담까지 앞두게 됐다.
하지만 김일성이 회담 직전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그런데 사후조치가 대북강경 일변도로 흘러 북한의 불만을 사게 됐다는 평가다. 당장 전군에 특별경계령이 하달돼 장병 외출·외박이 중지되는 등 군사대비 태세가 강화됐다. 정상회담 접촉 중 '김일성 주석'이었던 정부의 호칭은 '김일성'으로 환원됐다.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고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며 조의를 표하고 야당에서도 조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조의 표명과 조문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처벌을 경고했다. 대학가의 조문 시도도 '주사파의 암약'으로 규정됐다.
특히 청와대 오찬에서 박홍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가 학원가에 깊이 침투돼 있다"는 발언을 해 '주사파 논란'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사회 전반에서 대북 대화분위기는 소멸되고, 주사파 논란이나 김일성에 대한 6·25 책임론 등 대북 강경론이 우세했다.{RELNEWS:right}
물론 북한도 남북관계 개선보다는 미국과의 직접 협상으로 정권을 인정받으려는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받기 어렵다.
YS 집권 첫해만 해도 핵비확산기구(NPT)를 탈퇴하면서 북핵위기를 촉발했고, 이듬해 남북회담 도중 '서울 불바다' 위협 발언을 내놨다. 96년에는 잠수함을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 침투시켰다가 발각돼 우리 군이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극악으로 치닫던 남북관계는 김대중정부 집권 뒤 2000년 정상회담 성사 등을 시작으로 회복세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