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동안 시국사건·양심수를 변호한 인권변호사 한승헌이 한국현대사의 맥락에서 17건의 정치재판을 실황중계한다.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를 통해 독자들은 여운형, 조봉암, 김대중 등의 정치지도자부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법정에 서야 했던 이름 모를 대학생까지, 야만의 시절에 법정에 목숨을 맡겼던 수많은 역사 속 증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승헌 변호사의 기존 저술들이 본인이 참여한 재판을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는 해방 이후의 중요 정치재판에 초점을 맞추고 법률적 전문성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정황과 진실을 입증할 만한 각종 문헌자료, 저자 개인의 체험과 견문을 동원해 정치재판의 진실과 거짓을 검증해나갔다.
한승헌 변호사가 재구성한 현대사 정치재판 외에 본인이 직접 참여한 사건에서는 법정 풍경이 훨씬 생생하게 전해진다. 특정 사건에서 법정 단상의 제지 발언이 빈번해지고, 경고·휴정·항의소동·퇴정명령 등으로 혼란에 빠지고, 검찰관이 누군가에게 쪽지를 받아보고는 밖으로 들락거리는 모습, 격렬한 논박이 오고가는 법정의 분위기를 실제 옆에서 일어나는 상황처럼 보여준다.
때로는 역사적 평가와 함께 개인적 감회를 덧붙여 단순한 역사서나 기록의 의미를 넘어선 읽을거리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연관성을 조작하기 위해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인으로 내세운 여정남을 한승헌 변호사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소위 '인혁당 재건위' 인물 8인에 포함돼 사형을 당했다는 것 외에도, 그가 변호한 사람 중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욱 후회가 되는 것은 변호인인 자신 역시 같은 시기에 반공법 위반으로 묶여 들어가 그와 같은 구치소에 수감되어 형 집행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본문 10장, 11장 참조). 가슴 아픈 한국현대사를 객관적 자료와 재판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면서도 개인적 경험을 적절히 반영한 흥미로운 읽을거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방 후 역사적 재판을 다룬 1~5장 이후의 모든 사건은 어떻게든 한승헌 변호사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건들이다. 정치권력과 문학이 정면충돌한 해방 후 첫 필화 사건인 소설 '분지'사건(본문 6장 참조), 한국 외교사의 가장 잘못된 일로 꼽히는 동백림 사건(본문 7장 참조),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본문 17장 참조)의 변호인으로서 그는 재판의 현장, 그곳에서도 가장 깊숙이 자리해 엄정한 논리를 펼친 변호사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긴급조치 관련 사건과 필화 사건의 변호를 맡았으며,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여러 단체의 활동에 중요한 증인이자 조사관으로 참여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규명 때에는 시민단체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한국현대사 재판의 산증인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다. 집권자의 의도에 영합하는 그때 그 재판의 현장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정치재판의 실상과 허상을 간파하고, 시국사건의 진실을 법정 밖 세상에 알리고, 또 미래 세대에도 전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은 그의 오랜 결심이 빚어낸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