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2년, 진실과 기억을 위한 연대'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둔 지난 9일 서울 제기동에 있는 역사문제연구소에서였죠. 여전히 세월호에 관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날 포럼에서 소개된 주제발표 4건을 전합니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① 세월호 선원은 왜 자기도 위험해지는 순간까지 대기방송을 했나 ② 세월호 고통 앞에서 "중립 지키라"는 이들은 누구인가 ③ "잊지 않겠다"던 다짐, 왜 "잊어가겠다"는 도피 낳고 있을까 ④ "진상 캐야 하는데, 사무실 임차료·집기 외상으로 버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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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2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영정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2014년 5월 10일 안산에서 '세월호 희생자 추모와 진실을 밝히는 국민 촛불 행동'이 열렸다. 이날 화랑유원지에서 노란 리본 잇기 행사로 3000여 명의 시민들이 합동분향소를 에워싸는 노란색 인간띠를 만들었고, 단원고를 거쳐 안산 문화광장으로 행진했다. 고잔역에서 분향소로 걸어가는 동안 안산지역의 슬픔을 느낄수 있는 날이었다.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잊지않겠다' '행동하겠다' '과연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세월호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작가 노용헌은 '세월호 참사 700일 - 2014년 4월 30일부터 2016년 4월 9일까지'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사진가로서 사진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는 것이 최소한의 행동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에 출근하니 큰 대형사고로 TV는 속보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라크전쟁을 통해 컴퓨터 게임하듯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미사일의 코부분에 장착된 카메라로 포착한 화면을 TV로 보아왔던 것처럼, 영상의 폭력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4·16 그날 보도는 오보의 연속이었다. 방송사는 전원구출이란 오보의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고, 구조작업에서도 체계적인 구조 없이, 많은 인력이 총동원돼 구조를 하고 있다는 말만 전하기 바빴다."
노 작가는 영상의 폭력성을 기록하는 데는 어느 때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고 강조했다.
"수잔 손탁의 '타인의 고통'에서 볼 수 있듯이, 스펙터클로만 현실을 인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의 이미지'는 범람하며, 그 이미지들은 각각의 고통을 그저 그런, 대동소이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걸 보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구경꾼, 겁쟁이, 관음증 환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중독돼 더 큰 고통의 이미지를 봐도 무감각하게 느껴질 수 있기에, 영상의 폭력적인 의미는 기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노 작가는 한 후배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후배가) 졸업작품으로 세월호를 생각하고 있는데 진도 팽목항 현장에서 사진작업을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졸업작품으로 생각한다는 게 잘못된 생각이다. 단지 큰 이슈가 있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사진으로 담든다는 것은 피사체에 대한 착취라고 생각한다. 유가족과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슬퍼하는 유가족의 사진을 찍지 마라, 단 촬영을 하겠다면 사건 당사자보다는 그들을 돕는 제3자, 봉사자들 중심으로 촬영을 하는 게 나을 듯 싶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드라마틱한 순간으로 여기고, 그들의 감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들을 단지 프레임 속 구도로만 생각하는 사진가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특종을 낚았다고 생각하는 얄팍한 사진기자일 뿐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속성이 진실을 재현한다고 믿는 것만큼, 우리는 사진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으며, 폭력적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무심결에 찍은 사진들이 얼마나 초상권을 책임지고 있는지, 그들의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고민 안하면 얼마든지 왜곡보도의 문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으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상 사적인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사적 기록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올바른 기록을 하기 위해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사진을 최대한 배제하고 5W1H(육하원칙)을 지켜야 할 것이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 촬영했는지 알 수 없는 사진은 기록으로서 가치보다는 예술적인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 "사진에서도 결코 중립적인 시각이란 없다는 것을 잘 안다"노 작가는 2014년 7월 24일,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 100일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014년 7월 24일은 세월호참사 100일째다. 그런데도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 되지 않고 있다. '수사권'을 포함하는 내용의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가족의 국회 단식 농성은 장기화되고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서울광장까지 1박 2일 40㎞, 100리 길을 걸어 왔다. 비오는 날 시청광장의 수많은 참가자들과 유가족은 청와대 행진을 시도했고, 차벽과 경찰들에 막혀 프레스센터 앞에서 밤새 대치했다. 광화문 단식 농성장까지도 가지 못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등 두 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던 때의 기록도 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차에서 내려 단식 농성 중인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 씨를 위로했다. 교황도 유가족을 위로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18일(현지시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세월호 유족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그에게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 작가는 "중립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고 전했다.
"나 또한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연장'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나는 과연 나의 연장으로 무엇을 말하고 전달하고 있었는지. 사진을 한지도 27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면서 항상 질문하던 것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 시각에 대한 물음이었고, 기록에 바탕을 둔 사진에서 과연 객관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항상 어느 편도 아닌 객관적 시각을 가지려고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정공법적인 접근 방식을 가져 왔다. 그럼에도 결코 중립적인 시각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객관적 시각이라 주장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에 의해서 언제나 변질되는 것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기록자로서, 증언자로서, 목격자로서,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며 "오늘도 하루가 지나가고, 많은 담론과 이야기들이 잊혀져간다. 기록을 넘어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고 말했다.
◇ "참사와 관련한 모든 이들의 기억…기록으로서 올바르게 쓰여져야"세월호 2주기를 맞아 노 작가는 "그간의 모든 행동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돼야 한다"며 "구술기록, 유가족 인터뷰, 영상과 사진 모두 기록이 될 만한 것들은 기록으로서 가치를 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기 위한 중요한 장소가 세 곳 있다. 첫 번째 팽목항, 두 번째 안산, 세 번째 광화문이다. 이외에도 많은 곳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행동해 왔다. 전국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곳에서 2주기가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광화문에서 행해지는 상황을 기록했다. 아카이브(정보 창고)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정리는 필수적이다."
결국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체계적인 정리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세월호 72시간의 록'(past.media.daum.net/sewolferry/timeline)은 정리가 잘 돼 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세월호 이미지 검색을 하면 30만 3465건이 검색된다. 수많은 사진들이 아카이브로서의 역할을 다하려면 사진이 찍힌 날짜와 어떤 장면이라는 내용이 함께 기록돼야만 그 역할을 할 것이다. 페이스북 또는 개인적인 기록을 해 왔던 수많은 사람의 사진들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분류해 기록으로 정리되길 바란다. 사진과 영상뿐 아니라, 세월호 관련 기사들 그리고 수많은 웹자보들, 노란리본 등 상징적인 그림·물품, 이 모든 것들이 '416기억저장소'(www.416memory.org)에 체계적으로 정리되길 바란다. 참사와 관련한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기록으로서 올바르게 쓰여지길 바란다."
그는 "사진이 지닌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힘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2014년 5월부터 시작한 세월호 사진 기록도 2주기를 맞는다. 2015년 1년간의 사진을 일단락 짓고, 또 다시 2016년을 보내고 있다. 세월호 사진기록단은 아니지만, 그동안 광화문을 중심으로 사진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과연 나의 사진이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현장에서 보고 느끼며 함께 하려 했다. 사진이 지닌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힘을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