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관련 업체 중 롯데마트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며 피해자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나머지 업체들은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도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영국계 옥시레킷벤키저는 언론 등 외부 접촉을 피하며 철저히 침묵중이다. 옥시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위해 일찌감치 법인을 청산한 사실이 알려져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 '옥시' 수년째 철저한 무대응 일관, 뒤에선 각종 편법 불법 정황
가습기 살균제. (사진=윤창원 기자/자료사진)
옥시레킷벤키저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발생한 이래로 지금까지 언론 등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피하고 있다. 전화번호를 감추는 치밀함 속에 질문도 오로지 서면으로 받고 그마저 대부분 응답하지 않는다. 18일 롯데마트가 관련 업체들 중 처음으로 피해자 보상을 약속하며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옥시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이처럼 장막 뒤에 숨어있던 옥시가 이번 사건의 책임소재를 피하기 위해 갖가지 불법을 저지른 정황이 검찰 수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학교 연구팀에 의뢰해 유리한 데이터를 뽑아내고, 사내 게시판에 부작용 관련 글을 지웠다. 또한 민형사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기존 법인을 청산하고 새 법인을 설립하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회사까지 바꿀 정도로 치밀하게 대응한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부장검사)는 옥시 측이 서울대와 호서대에 의뢰해 제출한 유해성 반박실험의 조건 자체가 회사에 유리하도록 조작한 의혹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조작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대학 연구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내 게시판에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부작용 호소글 수백건을 임의로 삭제한 것도 수사 대상이다. 검찰이 지난 2월 옥시를 압수수색해 확보한 사내 전산망 서버를 복원해보니 상품후기 및 문의게시판에 올라온 가슴통증과 호흡곤란 등 상품 부작용 호소 게시글 수백 건이 삭제됐다.
옥시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민·형사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기존 법인을 청산하고 새 법인을 설립하는 편법을 쓴 정황도 포착됐다.
옥시는 2011년 12월 12일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조직을 변경했다. 이는 "피고인이 사망하거나 피고인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을 경우 공소기각 결정을 하도록" 한 형사소송법 328조를 악용한 꼼수로 검찰은 보고 있다. 형사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법인을 아예 소멸시켰다는 것.
이같은 옥시의 부도덕한 행태가 속속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에 검찰은 오는 19일 옥시 측 실무자를 가장 먼저 불러 본격적으로 조사를 실시한다.
◇ 롯데마트 홈플러스 면피용 사과, "이제라도 피해 수집 나서야"
롯데마트 김종인 대표이사가 1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 및 구체적인 피해자 보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책임 소재가 있는 20여개 다른 회사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침묵하며 여론 눈치를 살피고 있다.
롯데마트의 경쟁자인 홈플러스는 18일 오후에 여론을 의식한 듯 "피해자들의 아픔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향후 검찰의 공정한 조사를 위해 최대한 협조하고 성실히 소명하겠다"며 "검찰 수사 종결시 인과 관계가 확인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다"고 짧은 입장을 밝혔다. 나머지 애경그룹, SK캐미칼 등은 침묵중이다.
기자회견을 한 롯데마트도 피해자 보상 범위와 시기와 방식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검찰의 소환조사를 앞두고 면피용 사과를 한 것이라고 개탄하면서, 이제라도 단일화된 창구를 만들어 피해 사례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찬호 피해자 모임 대표는 "5년이 지나 이제 검찰이 오늘부터 관련자들을 소환을 하겠다고 하니 기자들 앞에 브리핑을 하는 것"이라며 "피해자들은 오늘 사과 기자회견에 대해 연락받지 못했고 언론 보도를 보고 이 자리에 왔다"고 지적했다.
강 대표는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까지 찾아가고 검찰에 찾아가 항의하고 피해 사실을 접수하는 등 우리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며 "옥시레킷벤키저 피해자가 가장 많아 우선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항상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고 가해기업 중 피해자를 만나러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 및 사건 관련 시민단체 회원들이 18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롯데마트 김종인 대표이사의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 및 구체적인 피해자 보상 계획 발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살균제로 아내와 아이를 잃은 피해자 모임 안성호 유족대표도 "만약 롯데가 진심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한테 연락하고 피해자들이 올 수 있는 시간에 그 시간에 기자회견을 했었어야 했다"며 "롯데마트가 정말 피해자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롯데마트뿐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던 기업들을 만나 공동 대책 마련을 위한 기구를 설립해서 같이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최예용 소장은 "(롯데마트의)이 사과는 피해자와 국민을 상대로 한 사과가 아니다"라며 "검찰 수사를 앞두고 사과를 한 것은 검찰에 잘 봐달라고 사과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소장은 "정부와 환경부가 지난해 피해 접수를 받은 것도 질질 끌다가 올해는 아예 피해신고조차 받지 않고 있는 등 뒷짐만 지고 있다"고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규탄하며 "이제라도 기업측이 나서서 신고 센터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습기 살균제 폐손상으로 정부가 현재까지 인정한 사망자는 146명이다. 추가 피해 신고 접수와 민간에 신고된 접수를 포함하면 전체 피해자 규모는 1500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사망자 규모도 230~24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PHGM나 CMIT/MIT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 판매해 '살인죄'로 고소된 업체는 ▲옥시레킷벤키저 ▲한빛화학 ▲롯데마트 ▲용마산업사 ▲홈플러스 ▲크린코퍼레이션 ▲버터플라이이펙트 ▲아토오가닉 ▲코스트코코리아 ▲글로엔엠 ▲애경산업 ▲SK케미칼 ▲이마트 ▲GS리테일 ▲퓨엔코 등 15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