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제공)
15일(일) 밤 9시 40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학자'라는 타이틀에 가려져 있던 개혁 정치가 율곡 이이의 참모습을 들여다본다.
1554년 열아홉 살의 율곡 이이는 돌연 유학 공부를 중단하고 금강산으로 가출한다. 그 후 금강산의 한 절에 들어가 불경을 공부한 율곡 이이는 승려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부처'라고 불렸다.
당시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사회다. 이때의 가출은 훗날 율곡 이이의 삶에 큰 걸림돌이 된다. 심지어 그가 과거를 보러 갔을 때 성균관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시험장에 들어서는 것조차 거부당할 정도였다.
조선을 강건하게 만들고자 했던 율곡 이이의 포부는 1567년 14대 왕 선조가 즉위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주장한 것은 바로 '경장(更張)'이다. 묵은 관습과 고착화된 제도의 폐단을 올바르게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대의 시급한 과제를 경장으로 보고 선조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선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선조의 잘못된 정치를 신랄히 비판한다.
"전하께서는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끝내 보존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시는 것입니까?" - 선조수정실록 1582년 9월 1일
정사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꿰뚫어본 율곡 이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경장을 외친 현실정치가이자 진정한 개혁가였던 것이다.
1583년 6월 조정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는 상소들이 빗발친다. 율곡이 선조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 갑자기 일어난 현기증으로 선조를 알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소의 빌미가 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른바 전마 사건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함경도를 포위했을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는 활 쏘는 사람들을 뽑아 북방으로 투입시키면서 군마(軍馬)를 바치는 사람은 면제해 줬는데, 이를 선조에게 미리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파직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선조는 오히려 율곡을 공격한 인물들을 귀양 보낸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직을 요구하던 율곡 이이에게 선조는 이조 판서직을 맡기며 전폭적인 신임을 보인다.
그런 율곡 이이가 1584년 1월 4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끊임없이 개혁을 부르짖은 정치가 율곡 이이. 누구나 알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그의 삶이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