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사과를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 - 아론 라자르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와 더랩 에이치 김호 대표의 공저 '쿨하게 사과하라'에 나오는 사과에 관한 격언이다. 이 책은 과거 패자의 변명으로 낙인 찍혔던 '사과'가 이제는 리더의 가장 쿨하고 현명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조명하고 있다. '사과는 잘 못하면 독이 되지만 잘 하면 약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에서 사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지하철 구의역 사고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갖고 고인과 유가족,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거듭 사과했다. 박 시장의 사과는 한 박자 늦었고 실행이 담보돼야 한다는 지적을 받지만 적어도 진정성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박 시장은 서울지하철 구의역 사고에 대한 '늑장 대응'과 감수성이 부족한 '무감각 대응'으로 취임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4년 사이에 동일한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가 3번이나 발생하면서 박 시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인 노동과 청년의 영역에서 큰 구멍이 뚫렸다.
박 시장을 궁지로 몰아넣은 '메피아(서울메트로+관피아)'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는 답변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는 비난까지 쏟아졌다. 지난달 광주 방문 이후 광폭행보를 계속해 온 박 시장이 이번 구의역 사고로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받으면서 대권가도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박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시민의 꿈을 지키고, 이뤄가는 시장이 되겠다는 제 초심을 지키지 못했다. 고인과 유가족, 시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앞서 박 시장은 지난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유달리 책임감이 강했던 청년의 꿈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사죄드린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정재승·김호 두 저자는 책에서 사과의 메시지는 3R(Regret, Responsibility, Remedy)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대에게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반드시 해야 하고(Regret, 유감), 유감을 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적, 윤리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야 하며(Responsibility, 책임), 이미 저지른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책을 제시해야 한다(Remedy, 치유·보상)가 3R의 핵심이다.
박 시장은 구의역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데 이어 "미처 현장을 살피지 못했다. 제 불찰과 책임이 크다"며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어 '특권'과 '관행'을 반드시 바로잡겠다며 메피아 척결과 서울메트로 외주 용역업체의 직영 전환 검토, 지하철 안전시스템의 혁신 등 '치유와 보상' 방안을 제시했다.
박 시장의 사과는 사과의 메시지에서 3R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시지탄'의 아쉬움은 있지만 진정한 사과로 평가할 수 있다.
박 시장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4·13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박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총선에 앞서 수 차례 국회심판론을 언급하며 국민들에게 표로 심판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국민들은 정권심판론이라는 회초리로 박근혜 정권을 심판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사과는 커녕 모르쇠로 일관했다.
총선 참패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씨 사건에 관련해서도 박 대통령의 사과는 없었다. 측근 비리가 터져도 총리 후보가 잇따라 중도 하차해도 박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진정성 있는 사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기간에 수 차례 많게는 수십 차례 대국민 사과를 하고 고개를 숙인인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국민들이 사과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할 때도 박 대통령이 사과를 하지 않으면서 '불통과 독선'의 이미지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박원순 시장의 사과는 타이밍이 늦어 효과가 반감되기는 했지만, '쿨한 사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박 시장의 사과가 정말로 '쿨한 사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구의역 사고와 관련해 약속한대로 재발 방지책이 제대로 이행되어야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11월에도 강남역에서 스크린도어 사고가 발생하자 2인 1조 근무 등의 재발 방지책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서울시의 약속은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박 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약속한 사항이 지켜지는지 여부가 박 시장의 사과가 쿨한 사과였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박 시장이 사과 이후 확실한 재발 방지책의 이행을 통해 다시 시민시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러나 물이 엎질러진 이후가 중요하다. 박 시장의 명운을 가를 '쿨한 사과'가 될 것인지, 상투적인 재탕 삼탕의 사과가 될 것인지, 박 시장의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