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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 역사'

책/학술

    신간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 역사'

     

    프로문예비평가 임화, 심훈, 채만식, 이태준 등 식민지 조선에서 저마다 필력을 자랑하던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하나는 영화다. 당시 논객들은 전문영화인이 아닌 경우에도 영화를 감상하고 영화에 대해 말을 보태며, 조선영화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과연 이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했으며, 영화에 어떤 기대와 욕망을 걸었던 것일까?

    '조선영화란 하(何)오: 근대 영화비평의 역사'는 191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조선영화를 둘러싸고 전개된 영화비평문을 엮은 해설서이자 자료집이다. 백문임·이화진·김상민·유승진 등 4명의 편저자는 조선영화사의 윤곽을 그리는 데 가장 핵심적인 비평문 55편을 선별해 초기영화, 변사, 사회주의 영화운동, 토키(talkie, 발성영화), 기업화론, 전쟁과 국책(國策) 문제 등 14개 주제를 구성했다. 각 주제마다 편저자의 해제와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목록을 실었고, 당시 조선영화 생산·수용 현장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신문·잡지 기사를 스크랩으로 덧붙였다. 영화 장면과 제작·상영 현장, 영화인들을 담은 150점가량의 사진은 조선영화계 안팎 풍경을 상상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근대 영화비평문을 집대성한 1차 자료집들의 성과를 딛고, 당시 영화담론의 흐름과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첫번째 성취라 할 수 있다. 최근 영화사 연구의 관심과 편저자들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조선영화사를 치열한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우리 근대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춘원 이광수는 1916년 발표한 '문학이란 하(何)오'에서 문학을 "특정한 형식하에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것"으로 정의한다. 형식과 이를 통해 표현하는 내용(사상· 감정)은, 근대에 정립된 모든 예술장르의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서구식 근대를 대표하는 문명이자 기술이자 예술로서 영화가 도입된 이래, 영화를 감상하고 제작하는 이들은 바로 그 조선영화가 어떤 형식을 띠고 어떤 내용을 담아야 좋을지 고민했다.

    '조선영화란 하오'는 조선영화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책에서 줄곧 언급하는 조선영화 개념은, 지금 우리가 한국영화로 지칭하는 대상과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조선영화는 시기적으로 1900년 전후 초기영화부터 1945년 해방 전 신체제하 영화까지를 일컫는다. 해방 후 한국의 입장에서, 그 이전까지 이 땅에 살아 움직여왔던 영화를 한국영화에 포섭해버린다면 식민지 조선의 영화가 띠고 있던 이질성이 상당 부분 휘발되고 만다. 그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편저자들은 조선영화 개념을 고수한다.

    이때 조선영화의 역사는, 조선인 스탭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영화를 들여와 관람하며 영화에 대한 나름의 상을 잡아가던 '감상만의 시기' 영화활동까지를 아우른다. 활동사진과 연쇄극(무대극을 통해 관객에게 서사를 전달하고, 무대에서 재연하기 어려운 장면을 스크린에서 제시하는 형식), 변사의 존재는 영화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기에 앞서, 영화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며 영화가 연극이나 사진 등 다른 예술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달라야 하는지를 모색하던 이들의 실험을 보여준다. 특히 변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관람객이 섞여 있는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어 해설을 통해 "극장이라는 공간이 민족을 상상하게 하는 경험이 장이 되도록 했다"(61면)

    1923년 무대극 없이 필름으로만 구성된 영화 '월하의 맹서'가 만들어지고, 같은 해 조선 최초의 장편 상업영화 '춘향전'이 개봉하면서 조선영화는 제작의 시대로 돌입한다. 이는 영화를 근대 문명의 일환으로, 서양에서 건너온 신기한 발명품으로 경탄하며 바라보던 데에서 나아가, 자본·기술·인력이 집약된 산업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영화산업에서 일본인과 일본자본의 투입은 불가피했고, 이는 클로즈업 등 영화기법, 그리고 좀더 나중 일이지만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한 전시체제에서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조선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동시대 조선 농촌을 배경으로 식민지 현실을 담았다는 점에서 민족영화로 중요하게 평가받곤 한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두번째 작품으로 조선인 스탭과 배우, 제작진만으로 꾸려진 영화라는 점에서도 가장 조선영화다운 영화로 여겨졌다. 그런데 '아리랑'이 당대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아리랑'은 단성사에서 개봉해 전례 없는 흥행성적을 거뒀고, 이는 조선 대중이 열광하던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재현한 덕이 컸다. 이 책에 실린 나운규의 글 '조선영화 감독 고심담: '아리랑'을 만들 때'(1936)를 통해 조선영화는 돈 내고 볼 재미가 없다던 대중의 인식을 빠른 전개와 화면기법으로 돌려놓은 데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식민지 근대라는 테두리 안에서 조선영화를 읽을 때 '민족(주의)적 성격'에 지나치게 의미를 두다 보면, 영화매체가 가진 영화적 속성과 대중성을 간과하기 쉽다. '아리랑'의 사례에서 보듯, 조선영화가 당시 추구하던 바가 무엇이며, 조선 대중이 원하는 영화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수입된 외국 영화와 관객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토키(발성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졌고, 미완에 그쳤지만 '아리랑 후편', '말 못할 사정'의 토키 제작을 시도했다. 토키는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성영화에 비해 훨씬 더 제작이 까다로웠으나, 1935년 조선어 토키영화 '춘향전'이 개봉하면서 조선영화계는 활기를 띠어갔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최초의 문화입법이라 불리는 조선영화령(1940) 공포다.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 등을 포괄하는 이 법령으로 제국일본은 조선의 영화 제작·배급·상영 전반을 통제할 수 있었다. 예술, 대중오락, 상품으로서 영화를 고민하던 이들은 이제 국민문화로서 영화를 설파한다. 이는 그때까지 존재해온 조선의 여러 영화기업들이 단 하나의 영화기업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흡수되는 과정과도 길을 같이한다.

    조선영화의 제도화를 뼈아프게 목도한 평자들은 한편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조선영화사 서술을 시도한다. 빈약한 자본과 예술성, 그리고 검열이라는 조건 등 조선영화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며 조선영화의 살 길을 모색한 것이다. 이구영이 "우리에게는 영화사가 없다"('조선영화계의 과거-현재-장래', 1925)라고 단언한 뒤 10여년이 지나, 임화는 두편의 '조선영화론'(1941/1942)과 '조선영화발달소사'(1941)를 통해 조선영화의 역사를 정리한다. 카프(KAPF)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영화담론에 몸을 담가온 임화는 '통일적 기업화' 등 식민지 영화산업의 구조적 모순을 문제 삼으면서도, "자본의 은혜를 꿈꾸지 못한 대신에, 그 폐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선영화의 특수성이며 유리한 지점임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예술로서 영화의 영화다움을 밀고 나가는 것만이 조선영화의 돌파구임을 재차 환기한다. 이는 곧 조선영화가 여전히 변화의 노정에 있음을, 조선영화다운 조선영화라는 것이 끝내 질문과 모색의 연속임을 우리에게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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