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가 신의 계시를 기록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종종 자신들의 생각이 신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성인은 구약 성서를 이성적인 저서로 여기길 거부하면서, 계시적 성격을 지닌 그리스의 저작들은 위대한 철학책으로 간주한다. 이스라엘과 그리스에 대한 이런 상반된 태도는 언제, 어떻게 발생했을까? 신간 '구약성서로 철학하기'는 그 오해의 근원을 먼저 탐구한다.
“궁극적 문제들(ultimate issues)을 다루는 두 종류의 글이 있는데 하나는 ‘이성’의 산물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에 의한 것이다. 플라톤 혹은 토머스 홉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가 이성적 작품에 속한다. 반면 구약 성서는 계시된 책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보고하는 문서다. 따라서 성서가 가르치는 것은 감사와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초월적 지식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계시는 이성과 양립할 수 없으며, 우리의 정상적인 지성이 정지될 때 발휘된다. 구약 성서에 대한 이런 이해의 기저에 있는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적 사고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서론_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 가운데(19쪽)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적 틀은 신약 성서에서 예수의 사도들이 가르친 독특함과 매력을 포착해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성서의 문맥에서는 그런 이분법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 대부분이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이 생겨나기 무려 500년 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약 성서의 핵심 부분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이성의 판단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서론_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 가운데(20쪽)
이처럼 저자는 신앙과 이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구약 성서를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방해 요소라고 주장한다. 원래 구약 성서는 이성적인 사유의 결과물인데 초기 기독교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계시적 성격만 부각시켰기 때문에 구약 성서의 핵심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기독교적인 해석틀에 따르면 구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계시된 복음을 증언하는 신약 성서를 보충하는 성격을 지닌 아류가 된다.
“기독교 교회의 교부들이 신약 성서의 가르침을 당시 경쟁 관계에 있었던 다양한 철학 사조와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이 이분법을 처음 채택했다. 한편 계몽주의의 철학자들은 이 이분법을 교회를 부수는 도구로 받아들여 기독교를 미신과 불합리를 주창하는 단체로 만드는 데 활용했다.” - <서론_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넘어서=""> 가운데(19쪽)
기독교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의도적인 왜곡의 결과로 구약 성서 저자들의 저작 의도가 사장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유지되어 구약 성서에 대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오류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인정한다면 구약 성서의 진면목은 지난 2,000년 동안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까지의 관점과는 다르게 구약 성서를 직접 쓴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시각에서 해석해야 함을 피력한다. 다시 말해, 구약 성서를 철학 저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약 성서 접근법에 대한 이런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 후, 저자는 이 책의 1부에서 구약 성서를 이성적인 저서로 보는 방법론적 틀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책의 백미인 2부에서 기독교적 해석틀에 의해 가려져 있던 구약 성서의 핵심을 새로운 해석틀을 사용한 일련의 사례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집어낸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들어보자.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에덴에서 아담을 쫓아내시며 평생 저주받은 땅에서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명령하셨다. 그 후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에게 내린 명령을 받들어 땅을 경작하는 농부가 되었다. 반면 동생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땅을 섬기는 일을 그만두고 양치기가 된다. 즉, 가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였고, 아벨은 반항하는 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먼저 제물을 바친 가인은 무시하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
“아벨은 땅에 대한 저주를 현실로 받아들이지만, 그 현실이 그의 충성을 강요할 만큼 내재적 가치를 지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벨의 반응은 복종과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과 하나님의 분노를 감수하면서 자기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을 확보하려고 지혜롭고 용기 있게 반항의 길을 간다. 아벨은 양치기의 삶, 즉 반항과 창조의 삶,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이 아닌) 참된 뜻으로 생각되는 것을 추구하는 삶, 인류의 참된 선을 구하는 삶을 대표한다.” - <4장_양치기의 윤리학> 가운데(139-140쪽)
이처럼 저자는 아벨이 인류의 참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은 것도 아벨의 이런 태도 때문임을 치밀한 사례연구를 통해 밝혀낸다. 마찬가지로 “온 땅의 재판장께서 정의를 행하지 않으실 겁니까?”라고 따지는 아브라함, “저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습니다”라고 떼쓴 야곱, “당신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려면, 나를 당신의 책에서 지워버리세요”라고 항의한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의 중심인물들도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라도 반항했던 사람들임을 제시한다. 이들은 모두 아벨과 같은 양치기다. 즉, 하나님께 반항하는 양치기의 나라 이스라엘을 땅에 순종하는 농부의 나라들인 이집트, 바빌로니아 같은 제국과 대조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양치기적인 삶임을 증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반항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을 이루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겼던 인물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한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지적은 가히 파격적인 해석일 것이다. 과연 구약 성서가 2,000년 동안 왜곡되어온 것일까? 어느 해석이 타당한지 판단하는 일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단, 이 책을 펼치면 구약 성서를 다시는 이전처럼 읽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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