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순이란 무엇인가? ‘오빠 순이’의 줄임말이다. ‘오빠에 빠진 어린 여자아이’라는 의미이며,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같은 대중 스타들의 열성적인 팬을 비하해 부르는 말이다. 보통 10대 소녀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좀더 적극적이고 맹목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특징이 있다. ‘적극적이고 맹목적인 태도를 취’하는, 즉 “방송국이나 연예인들의 집 앞에서 몇 달간 기거하”거나 “좋아하는 음악 그룹이 해체하면 자살특공대를 조직하”는 빠순이가 얼마나 될까? 저자들은 그런 빠순이는 ‘일탈’ 또는 ‘최정예’로 보면서, 빠순이를 넓고 엷은 의미, 즉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열성 팬’의 수준으로 생각한다. 팬에는 세 부류가 있다.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안방팬’, 공개 방송을 보러 다니는 ‘공방팬’, 연예인의 사생활을 쫓아다니는 ‘사생팬’이다.
신간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는 적극적인 ‘빠순이 옹호론’이다.
일탈은 상대적 개념이다. 기성 사회는 ‘상식’에 반한다고 간주되는 어떤 사회적 현상을 일탈로 규정함으로써 그 현상의 사회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저자들은 ‘상식의 폭력’을 역이용하면서 빠순이는 전 사회에 편재하며, 빠질은 전 사회적 현상임을 말한다.
저자들은 빠순이 현상을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과잉 순응에 의한 전복’ 전략이라고 말한다. 이는 거울처럼 시스템의 논리를 흡수하지는 않으면서 복사하고 의미를 반영시킴으로써 그 논리를 뒤집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빠순이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찐득한 사람이었느냐”는 이진송의 항변이 강한 울림을 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이 책은 빠순이 아빠와 빠순이 딸의 ‘빠순이 예찬론’이다. 또한 빠순이 아빠와 빠순이 딸의 소통과 연대기다. 저자들은 빠순이를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일반 팬과 구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 팬덤과 빠순이를 구분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한다. 그러면서 “그래, 나 빠순이다!”라고 빠순이들이 당당해져야만 그에 따른 책임 의식도 커지면서 팬덤 문화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빠순이 없는 대중문화를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빠순이는 분명 대중문화를 키우는 젖줄이다. 이들은 열정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까지 갖다 바침으로써 대중문화가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오디션 '슈퍼스타K'의 참가 신청자가 200만 명이 넘는 것과 전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과연 무관하며, 이 모든 게 빠순이들의 헌신이 없이 가능했겠는가?
빠순이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취향에 등급을 매기려 드는 남성은 여성 수용자에 의해 흥행 성공을 거둔 대중문화를 폄하하면서 여성 폄하까지 곁들이는 일을 자주 한다. 2013년 6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관객 600만 명을 돌파했을 때 여성 관객이 김수현 얼굴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식의 평가가 난무했다. 또한 콘서트장이나 공개방송 현장에서 빠순이들은 ‘불가촉천민’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심지어 안전 요원들에 의한 폭행이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안전 요원들은 빠순이 알기를 연탄재처럼 아는 전 사회적 음모에 부응했다. 한마디로 배은망덕도 유분수이지 않은가?
빠순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소수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이른바 ‘혐오 발언’의 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소수자는 자괴감과 무력감 탓에 반론할 말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피해를 호소하는 일조차 포기하게 된다. 소수자는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피해를 말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한다. 그렇게 인내해서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면 그것도 해볼 만한 일이긴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더구나 빠순이를 가르치려 들고 계몽과 구원의 대상으로 본다. ‘네 사랑은 비뚤어져 있다, 건강한 사랑을 해라, 너는 상술에 놀아나고 있다, 눈을 떠라 수니여!’라고 꼰대질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감정이 있는 ATM’으로 엔터테인먼트 업계 종사자들의 ‘밥줄’이 된다며 빈정거린다.
팬덤은 삶의 의미와 보람까지도 공유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매우 독특하고도 강력한 공동체다. 여기에는 스타를 좋아하는 팬들 사이에서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소통, 연대, 결속, 우정 등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가 있다. 빠순이가 빠순이 공동체 내부에서 얻거나 획득하는 위로, 인정, 만족, 소통, 연대, 결속 등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들이 팬덤을 형성하는 동력은 소속에 대한 열망이다. 팬덤은 같은 색깔의 옷과 풍선으로 단결력을 확인하기도 하고, 팬덤 공동체는 그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던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창구가 되기도 한다.
팬덤은 스타를 매개로 팬들 간의 동질감과 연대 의식을 확인하는 공동체로 진화한다. 한국에서 만개하고 있는 떼창 문화는 스타를 매개로 한 팬덤의 자발적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떼창을 하는 이들의 그런 동질감과 연대 의식은 잃어버렸거나 제대로 구경도 해보지 못한 채 막연히 그리워하는 공동체에 대한 향수나 욕구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집단주의와는 다르다. 떼창을 하는 일부 서양인들이 무슨 집단주의라서 떼창에 열성을 보이는 건 아닐 게다. 이것은 어떤 집단 소속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 있디.
팬덤 공동체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팬질의 대부분이 스타의 생산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동시에 스타와 스타를 따르는 사람들의 언행에 관한 이야기를 생산하고 해석하고 공유하고 전파한다. 스타는 팬덤 공동체의 교주이지만, 근접할 수 없는 교주이기에, 스타를 매개로 공동체 성원들 간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다른 팬들과의 연대와 결속은 ‘상상의 공동체’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빠순이들이 누려 마땅한 인권은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 누리려는 인권 운동이자 민주주의 교육이다.
동방신기의 공식 팬클럽인 카시오페아가 서로를 ‘캉’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들이 동방신기를 매개로 해서 세운 팬덤 공동체의 존속과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이들이 “스타는 바뀌어도 ‘팬질’은 못 그만둔다”고 말한 것처럼, 추종 대상을 어떤 스타에서 다른 스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스타’보다는 ‘우리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중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모여 있는 우리들”이라는 도발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타는 하나의 매개체이고, 어떤 동질감과 연대 의식이 팬덤 공동체에는 중요하다. 이것은 10대뿐만 아니라 아줌마 팬들도 팬 활동을 통해 팬덤 공동체의 동지애와 연대감을 느끼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팬덤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소통과 대화를 위해 인터넷에서 다양한 팬픽 카페를 운영하기도 한다. 인피니트, B1A4, 2NE1, 빅뱅의 팬픽 카페를 보라. 팬픽은 회원들끼리의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도구이자 마당이다. 팬픽은 팬클럽 활동 차원의 팬 사이트나 팬픽 전용 사이트에서 만들어지는데, 팬픽 감상의 방식에 따라 추천/감상방, 비평방, 방명록, 표지방 게시판과 회원들 간의 친목을 위한 자유게시판이 운영된다. 간혹 사회적 논란을 빚기도 하는 ‘멤놀’에 빠진 청소년들에게도 공동체의 소통과 연대는 있다. 이것은 연예인의 가면을 쓰고 하는 일종의 가면놀이로 이해하면 된다.
팬덤의 진화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이나 ‘촛불 시위’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01년 문화연대가 여러 팬덤 공동체와 같이 힘을 합해 벌인 ‘가요 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이 잘 보여주듯이, 팬덤 공동체는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스타가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해왔다. 이처럼 ‘공공성’을 내세운 팬덤 공동체의 저항은 수시로 벌어지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JYJ 팬덤이 SM엔터테인먼트와 동방신기의 불공정 계약을 고발함으로써 2011년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계약상의 수익 분배 문제와 인권 문제 등을 고려한 표준 전속 계약서를 내놓게 한 것도 그런 예로 볼 수 있겠다. 2008년 ‘광우병 집회’에 여중고생이 대거 참여한 것도 팬덤의 힘이었다. 동방신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특히 동방신기 팬들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빠순이들의 스타 숭배를 사회적 문제로 본다 해도,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빠순이라기보다는 성인들의 무감각한, 아니 아예 생각조차 없는 태도다. 그들은 빠순이들이 그렇게까지 스타를 숭배하는 배경과 근본적인 이유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우선 비판을 하고 혀를 끌끌 차기에 급급하다. 그들의 입에선 ‘어리석다’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정작 어리석은 건 바로 그들 자신이다. 내 열정과 집착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반면, 너의 열정과 집착은 어리석고 추하다? 이런 어리석은 이중 기준에서 벗어나, 일단 팬덤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팬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외면하거나 방치하는 기존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빠순이가 ‘문제’라고 하는 인식 자체를 벗어던지고 소통을 해보겠다는 자세부터 갖자.
사회는 빠순이들로 하여금 심한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 무력감은 이른바 ‘학습된 무력감’이지만, 빠순이들의 냉정한 자기 인식도 그런 무력감을 키운다. 이는 ‘새우젓’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민희는 “우리는 새우젓을 먹을 때 일일이 모든 새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특히나 대형 공연장에서 열리는 콘서트는 모든 팬을 일시에 새우 눈으로 만든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객석의 우리는 단지 새우젓이라는 다수로 인식될 뿐이다. 새우젓은 팬들 사이의 동질감을 구체화한 표현이다. 적어도 새우젓의 의미를 이해하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자조적인 유머다. 고작 새우젓에 지나지 않는 팬들은 숱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자신의 활동 또한 스스로 깎아내리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신성한 활동이 아니라 결국 ‘팬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빠순이는 물론 빠순이를 아끼는 모든 이들이여! 이제는 인내하지 말자. 새우젓 없는 한국 음식이 허전하듯이, 새우젓 없는 한국 대중문화도 허전하다. 새우젓에 대한 긍지가 필요하다. 그런 긍지를 토대로 할 말을 하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와 힘도 생겨난다. 물론 아주 천천히 가도 좋으니 그간 내부 지향적이었던 소통, 연대, 결속의 힘을 조금만이라도 밖으로 돌리는 걸 생각해보자. 필요에 따라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도 좋다. 종국엔 “그래, 나 빠순이다! 어쩔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전국의 모든 빠순이에게 뜨거운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